우리들 모두에게 깊이 각인돼 있고, 지금도 누구나 두려워하고 있는 외환외기 때도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사람이 있다. 물론 그런 일들이 다 지난 후인 지금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찌됐던 하윤규 사장의 아이엠에프는 남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목재를 접한지 삼십년이 넘는 그의 인생역경과 경영철학을 들어보았다. 목재관련 사업이 운명처럼 하사장의 처음 진로는 목재쪽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장학금을 받으며 들어간 곳은 지금은 ‘경상대학교’인 진주농대 임학과였다. 졸업 후 고향서 멀지않은 중학교에서 교직에 몸을 담은 적도 있었으나 이 또한 제 갈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학문의 길로 들어섰으나 점점 가슴속에 더해만가는 생각은 산업현장에 들어가 봐야겠
한창 혈기왕성하던 30대초반을 열대림 개발을 위해 정글에서 원주민과 보내고 국내외에 조림업무를 담당하며 어느덧 40년의 세월을 목재와 함께 보냈다.국내 목재산업의 역사를 고스란히 체험한 부이택의 허남주 대표는 이제 건조기와 방부주약관의 국내 공급에 앞장서고 있다.가공기술에 비해 건조와 방부기술이 취약한 국내 실정이 안타까웠다는 그에게 국내 목재산업의 과거와 앞으로 그가 준비하는 건조 · 방부산업에 대한 미래를 들어보았다. 서울 농대 임학과 59학번 참으로 까마득한 나이다. 59년에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하고 한번도 목재 이외의 일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허남주 대표가 이제 40년동안 몸소 겪어온 목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임학을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해가 65년이다. 졸업한 그해에는 UN산림조사기구에
한국가구학회는 산업계와 학계, 일반학생들을 중심으로 가구재료 및 디자인 개발에 대한 발전을 꾀하기 위해 13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동안 묵묵히 노력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대외적인 관심의 밖에 있던 한국가구학회가 지난여름, 권 교수의 학회장 취임 후 큰 변화를 맞고 있다. 학회의 활성화를 위한 홈페이지가 개설되고, 학회지 발행 횟수가 연3회로 늘면서 학회에 대한 회원들의 참여도가 높아졌다. 이를 계기로 학회에 대한 한쪽으로 편중됐던 연구논문도 재료와 디자인 분야에서 비등할 정도로 고루 발표됐었다. "아직은 변화의 시작일 뿐…, 한국가구의 산학공동발전을 위해 학회가 갈 길은 아직 멀다"며 겸손함을 잃지 않던 권 교수. 그에게 한국가구학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들어보았다. 한국가구학회/장 취임 후 소감은
1468년 6월,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직접 이곳을 둘러보고 능터를 정한 이후, 경작과 매장은 물론, 조선시대 500여년동안 풀 한 포기 뽑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보호지역 광릉숲에 자리잡고 있는 국내 유일의 국립수목원이며, 가장 오래된 국내의 수목원인 광릉의 국립수목원을 찾았다. 아침공기가 시원하게 차창으로 들어오는 국내 숲의 보고(寶庫)에서 수목원장으로 부임한지 4개월이 지난 김남균 국립수목원장을 만났다. 광릉 국립수목원장의 부임 후 느낌은?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73년도의 일이다. 당시 대성목재는 수출훈장을 받을 정도로 잘되고 있던 시대이고 여기에서 현재의 김낙기사장과도 만났다. 둘은 입사동기이고 룸메이트 였으며, 현재까지 함께하고 있는 30년지기의 친구가 되었다. 이때 만난 많
처음 목재를 만나게된 것이 30년전이니 결코 짧지않은 목재인생이다. 원목을 고르면서 시작한 일은 이제 세월이 흘러 판상재의 판매가 점차 주력이되고 있는 삼산실업은 절친한 동료인 김낙기 공동대표와 함께하고 있다. 목재인생 반평생을 걷고있는 김광채 대표를 만나보았다. 고향의 향수가 느껴지는 목재산업 “아주 어릴적의 고향이 생각납니다. 고향 뒷편에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예전에 고향땅 전남 광양에는 집안의 대나무밭이 있었는데 ‘생금(生金)밭’이라고 하여 대나무가 금을 생산하듯 쓰임새가 많고 값어치가 많다는 말이였습니다.” 여느 시골소년의 마음속에는 나무라는 것이 그저 자주만지고 보고,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법 나름대로의 생산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런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김광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목재 수출국가이지만 한국과의 목재 교역량은 미미한 편이다. 그러나 매년 목재 교역량이 늘고 있다는 점은 두 국가간에 목재하는 연결고리가 점차 견고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중국, 홍콩 등을 거쳐 이제 한국에 온지 두달남짓 됐다는 오스트리아대사관의 베르너솝베버 상무참사관을 만나 양국간 목재무역에 대한 전망을 이야기했다. 한 · 오스트리아간 무역규모는.한 오스트리아간 교역량은 총 3억7,500만 유로에 달한다. 한국은 오스트리아에 올 상반기에 2억1,900만 유로를 수출했고 오스트리아의 대한국 수출은 1억5,600만유로 였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의 수출량이 1.4배정도 더 많다. 이는 전년도에 비해 14%이상 증가된 규모로 교역량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한 · 오스트리
목재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고민하여, 의논하는 열정과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국내 최초의 목재관련 실험실 벤처기업 우드택(주)를 설립한 국립익산대학 박희준교수를 만나 그의 연구성과와 산,학의 협력 방안을 들었다. 국내 목재관련 최초의 실험실 벤처창업을 하였는데1998년 10월 국립익산대학 내에 우드택(주)를 설립했다. 설립배경은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상품화하고자 고민하던 가운데 마침 정부에서 벤처기업육성에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면서 대학내에도 기업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고 당시가 IMF로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신규 사업에 투자하고자 하는 기업을 찾지 못하던 상황에서 직접 상품생산까지 해 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우드택(주)의 주된 생산제품은 목제욕실, 목제타일과 목제욕조 등이었으며, 연구과정
고무신 신고 미국에 목재를 사러가는 사람, 직원들과 같이 늘 작업복 차림에 땀을 흘리는 사장, 평산의 신현문 대표는 엉뚱하지만 "난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 싶다.소재를 생산하는 회사에다 첨단소재도 아닌 목재 무늬목을 생산하면서 벤처 인증을 받고 보유한 특허만 3개, 의장등록만 6개에 이르는 겁 없는 회사를 일으킨 신현문 대표를 만났다. 건식무늬목 시대 앞당겨 친지가 목재 일을 하고 있어 목재업계에 종사하게 된 평범한 이력과 달리 신현문 대표는 다른 목재인들이 이루지 못한 것들이 과감히 이뤄낸 사람이다.무늬목 매장에서 일하면서 창업을 꿈꿀 때 그는 이미 건식 무늬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기존의 습식을 권유했지만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평산을 설립하면서 그
캐나다 브티티시 콜롬비아주는 캐나다 내에서도 목재관련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이 지역의 목제품 회사들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BC Wood가 한국 시장 진출을 위해 나섰다. 이에 지난달 14일 한국을 방문한 BC Wood의 에릭 디그르트 일본 대표를 만나 향후 한국 시장 진출 계획을 들어보았다. 한국 방문 이유는.한국에서의 사업논의와 드림사이트코리아(대표 이광훈)에서 미국?캐나다 건축 견학단을 구성했는데 이들이 BC Wood의 회원사인 딕스 럼버와 바이스로이 홈스라는 두회사를 방문키로 해 이에 대한 조율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일본 진출 시기와 성과는. 일본으로의 수출은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으나 일본에 사무소를 개설한 것은 98년이다. 일본은 BC Wood 회원사들로부터 매년 1억 4,000만달러(
올해는 한중수교 1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과 한국 모두에 기념적인 해이다.수교 첫해인 92년 교역량 50억달러에서 지난해 359억달러로 양국간 교역도 지난 10년간 크게 증가했다.최근 중국은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 최대 침엽수 수입국가로 급부상했으며 남양재 수입은 세계 2위로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대 목재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국산 목제품의 수입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며 목재회사들의 대중국진출도 이어지고 있다.중국의 벌채규제로 중국산 홍송, 자작 등의 수급이 어려워지고 있는 점도 국내 제조업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국내 목재산업을 중국을 제외하고 논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시점이다.중화인민공화국 주대한민국대사관 리 샤오 칭 경제상무에게 중국의 목재산업에 대해 들어보았다. 7
나무를 가장 실용적이고 아름답게 실생활에 적용하는 방법, 김낙중 교수는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사람이다."꼭 나무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다른 소재와의 어울림, 적재적소에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나무의 미학과 용도를 가장 잘 찾아주는 일이죠"목조건축기술협회가 건설교통부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으면서 목조건축물에 대한 인식은 새로이 정의되고 있다. 사우디를 비롯한 세계는 김낙중 교수의 주 활동무대였다. 적어도 그가 학업을 계속하기 전까지는.현대건설에서 해외설계실에서 근무하고 이후에도 해외에서의 그의 행보는 계속됐다. 각 대학에서 강사로 나섰고 그때까지만해도 그가 다른 일을 할만큼 무모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건설회사에서 퇴직한 후 설계사무소를 창업한 그는 한창 설계사무실
"경영자가 이익을 못 내면 그것은 곧 범죄행위다"라는 말을 경영철학으로 삼고 사는 사람. 경제수종을 키우기 위해 해외조림이라는 과감한 방법을 단행한 사람. 말단직원부터 30년을 샐러리맨으로 한 직장에 몸담다가 드디어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하지만 이런 그에게 사회 초년시절 늘 따라 다니던 꼬리표는 "저 능력 없는 놈"이란 소리였다.인류에 도움이 되는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대표이사 취임 5개월째를 맞고 있는 한솔포렘 유명근 대표이사를 만났다. 일요일에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빨간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을 했던 엉뚱한 신입사원, "우리 빌딩에 저런 놈도 있나?"며 모두들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봤다.30년 전, 삼성그룹 공채에 합격해 전주제지로 발령 받은 그는 "일만 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