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소비자 깨우는 운동 필요재미있는 목공체험교육이 중요“목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품화하자는 것입니다.”전북대학교 임산공학과 이남호 교수의 말이다. 이 교수는 학자로서는 드물게 목재의 대중화를 선언하고 실천하는 인물이다. 그는 목재문화운동을 열어 전국민을 대상으로 목재홍보를 직접 만들기에서부터 시작하자고 외친다. 목공예품과 가구를 직접 만들고 목교를 놓고 통나무집을 짓고, 나아가 DIY로 일컬어지는 소형 목제품을 직접 만들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교수는 홍보메신저를 아줌마부대로 명칭하고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보통 남성은 직장 등의 일 때문에 시간상 여유가 없으나 가정주부들의 경우 일부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전북대
"베데코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무늬목 업계의 가장 큰 병폐는 기술개발이나 자기만의 노하우 개발에 힘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품질개발 보다는 어떻게 하면 얇게 깎아내 마진을 높일 것인가에만 신경 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지난 30여년 동안 무늬목 업계의 역사와 그 맥을 같이한 베데코 임경수 사장의 말이다. 임 사장은 건식 무늬목이 보편화되기 전인 지난 6년 전 무늬목 건조기를 들여왔을 때의 일을 잊지 못한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지를 다니다 보니 건조기의 필요를 느끼게 됐다. 그러나 그 당시 업계에서는 ‘저 집은 말라비틀어진 재고만 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새로운 흐름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다.”임 사장이 무늬목 시장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는 ‘남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이다. 일반적인 제품은
칠 공예부터 문화재 수리까지 만능 재주꾼옻칠 공예가 권영진 14세의 나이로 홀홀단신 고향 원주를 떠나 서울로 왔을때는 단지 무엇이든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자 하는 목표 뿐이었다. 우연히 나전칠기공장에 들어갔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시작했던 칠공예였지만, 이제 키워왔던 선생의 재주를 후학에게 전하려 하지만 더 이상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단다.공교롭게도 우리나라 제일의 칠공예 터전인 원주에 고향을 두고도 이곳 경기 남양주에서만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권영진 선생. 작은 오두막이라도 지어 고향인 원주에서 자랑스런 칠공예의 명맥을 지키고 싶다는 그를 만나보았다. 일취월장의 보람권씨가 답십리의 나전칠기 공장에서 기술을 습득할 70년 초만 해도 칠공예 제품의 인기는 절정기를 달리고 있었다.화려한 자개와
전통의 나전칠기와 현대적 디자인의 만남 칠기 공예가 김차봉1956년, 동란이후 중학을 마친 17세의 소년에게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는 진학의 꿈을 갖는 것 조차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고향인 거제도 옆, 충무 통영에 위치한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호기심으로 입문했던 칠기공예의 일이 평생의 업이 될줄은 당시에 상상이나 했을까? 전통을 누구나 공유할 수 있도록 대중화에 성공시킨 그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에 자리잡은 그의 공방을 찾았다. 훌륭한 스승과 좋은 솜씨칠기공예의 작품활동에 묵묵히 매진해온 김씨가 전통에 현대적 이미지를 적용해 대중화를 꾀하게 된 계기는 지금의 아이엠에프처럼 지난 1968년 석유파동으로 온 나라가 경제 위협에 처해 있을 때였다."모두에게 하루하루가
"우리 시대의 초상을 조각으로 살려낸다"조각가 김태환월드컵이 남긴 쾌거는 지난 4년간 땀흘려 운동한 대표선수들과 함께 모든 국민의 기쁨으로 돌아왔지만, 지난 몇년간 침묵 속에서 각 계 나름대로는 월드컵의 부대적인 문화행사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사실주의 표현의 메카인 구조조각 분야에서 타칭 장인격에 오른 조각가 김래환씨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그의 이름이 오늘날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비록 월드컵의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5년여의 세월동안 그의 시간과 에너지를 통해 완성된 수많은 작품들을 접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월드컵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조각으로 보는 한국의 명사 100인"이란 주제로 예술에 전당에 이어 일산 호수공원에서 초상 조각 전시회를 가진 조각가 김래
"생명을 되살려 희망을 숲을 가꾼다"한국나무종합병원 원장 이희봉"한국나무종합병원"이란 이름을 처음 접할 때, 이 분야에 특별한 관심이 없다면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보통의 병원인 줄 착각할지도 모르겠다.사람이야 아픈 데가 있다면 스스로 병원을 찾을 수 있지만 생명이 있음에도 자기표현이 쉽지 않은 나무가 병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근원적인 자연의 푸르름을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국 사람은 자연을 떠나서는 안정을 찾을 수 없음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뒤늦게나마 우리들의 관심 밖에서 병들고 망가져 버린 자연의 본 모습을 찾는데 힘쓰고 있는 것이다."수목을 시술하고 보호하는 일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천직"이라 말하는 한국나무종합병원의 이희봉 원장을 만났다. 전문인은 현장에서 만들어
전통 이미지 복원한 문화상품 "전통퍼즐"전통 목공예가 장경춘1959년, 6·25동란의 기억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무렵 서울 광희중학교를 졸업한 장씨는 평생을 사대문 안에서 살아 온 서울 토박이다. 그리고 그의 일생을 함께 한 또 하나의 친구가 바로 나무다.전쟁 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그는 곧 삶이란 전쟁을 위해 대문을 나서야 했고, 17세가 되던 그 해부터 지금껏 목공예의 길을 걸어 왔다. 오로지 백골 제작만군복무 후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제 10호 나전칠기장 고 김태희 선생 공방의 소목부에 입사해 소목 기능을 전수 받은 지도 어느 새 40여년이 지났고, 이제 그가 김 선생을 대신해 전통에 관심을 두고 있는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올해 예순 셋인 장씨의 주특기는 백골. 백
하늘을 향한 희망의 안테나 "솟대"국내 유일 솟대 전문 조각가 윤영호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충주의 첫인상은 조용한 도시였다. 시내에서도 한참을 들어가 도착한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그곳에 가면 세월 묻은 나즈막한 돌담과 금낭화, 붓꽃, 둥글레 등 야생화에 둘러싸인 솟대 전시장이 있다.사라진 우리문화 "솟대"의 의미를 찾아내고 현대적 이미지로 승화시킨 옹고집 조각가 윤영호 씨를 만났다. 솟대의 역사를 찾아15년 전, 서울 현대미술관(지금의 현대아트갤러리)관장을 지낸 그는 원로 권옥연 화백의 그림 속 솟대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솟대를 조각하기 시작했다."프랑스 유학파였던 권 화백의 전시회장에서 몇 십년전 그린 그림 속에 자리잡은 솟대를 보게 됐습니다. 권 화백에게 대충 설명을 들은 뒤 곧바로
목공예 대중화 전령사원용목 조각가송파IC에서 성남방면으로 조금만 나가면 작은 마을이 눈이 들어온다. 마을 한 가운데 노거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를 조금 지나쳐 올라가 한적하고 소박한 원용목 조각가의 작업실 찾았다.사실 그가 유명세를 타는 이유는 "나무올"이라는 목공예 사이트 때문이다. 컨텐츠들이 대부분 유료화되는 지금 나무올에서는 무료로 인터넷 목공예강좌를 개설해 일반인에게 목공예를 대중화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나무올을 운영자인 동시에 조각가의 길을 걷고있는 원용목 조각가의 나무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목공예 확산 주역 "나무올"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는 원용목 조각가는 23년전 처음 목공예를 접하게 됐다.현재 홈페이지 나무올(www.namuall.com)을 직접 운
대를 이어온 목탁 제작 외길충청남도 무형문화재 목탁 제작자 공문수목탁도 관악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여러개의 목탁으로 7음계를 표현하는 게 가능하다는 공문수 목탁제작자는 할아버지 때부터 3대를 이어 목탁을 제작하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목탁을 만져온 그는 목탁 제작을 시작한 지 20년이 지난 후 비로소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테가 소리의 완충 역할을 하면서 울리는 그 소리의 매력, 몇번이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자신이 만든 목탁소리에 그는 다시 목탁을 깎는다. 좋은 목재가 있는 곳에국내에서 국산재의 사용은 채 6%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목재로써의 가치를 지닌 국산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목탁제작자 공문수씨는 좋은 나무가 있다면 수종을 가리지 않고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춘 전통목기목공예 목기명장 1호 서태랑열여섯살에 불의의 사고로 한쪽 팔목을 잃었을 때 장애의 고통보다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잡았다는 그. 불행을 성공으로 뒤집고 목기명장 1호가 되기까지 그와 함께 했던 사연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97년 신한국인상에 이어 작년 목공예가로는 처음으로 산업포장을 받은 국내 목공예 목기명장 1호 서태랑을 만났다. 목기제작은 타고난 팔자"사람에게 사주가 정말 있다면 저는 목기 만드는 일을 팔자로 타고난 것 같습니다."경남 함양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던 그는 사고직후 1년여 동안 사람들을 마주 대할 수 없었다.고민 끝에 인근에서 목기제작을 하고 있던 이복후씨의 공방을 찾았지만 그의 처지로는 일의 어려움보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하는 가족
목공예는 실용성이 생명이다목공예가 김정호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가구 제작을 중단했던 그가 학문을 통해 다시 목재와 만났다. 그의 목공예작품들은 실용적인 가구가 주를 이룬다.인공적인 MDF보다는 천연 원목의 맛을 아는 진정한 목수. 김정호의 공방을 찾았다. 학업에 대한 갈망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열일곱 어린나이의 그는 목공구를 손에 쥐었다.75년 친구 소개로 가구회사에서 일을 하던 목공예가 김정호는 늘 못다 이룬 학업이 아쉬움으로 남았다.과감히 가구 일을 접고 대학입학을 위해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학공부를 하던 첫해 홍익대 무역학과에 합격했으나 그에게 학업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것이었다. 등록금이 없어 잠시 보류하게 된 학문에 대한 열정은 그가 처음 배웠던 가구와의 인연을 더욱 깊게 했
예술혼 깃든 바이올린 선율현악기 제작자 이종대친구 아버지의 일손을 도우며 익힌 악기 제작기술은 그의 생업을 바꾸어 놓았다. 오직 현악기 제작기술밖엔 없었기에 이 길을 택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악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 서슴없이 대를 잇겠다는 막내아들 때문에 흐뭇해하는 현악기 제작자 이종대를 만났다. 악기에게 소리는 생명이다"단짝처럼 어울리던 친구 집이 현악기 공장을 했었는데, 그곳에 놀러가면서 처음 현악기를 알게 되었죠." 친구 아버지의 일손을 돕다가 현악기의 매력에 빠지게 된지 벌써 30년이 흘렀다.가구 등 일반 목공이 목재 외부의 형태를 만드는 일이라면 악기는 거기에 소리는 더해야 하는 난이도 있는 일. "잘라지고 쪼개진 나무는 죽어있죠. 하지만 깍아주고 다듬는 정
조선시대 서민 생활용품 '한지 공예'한지공예가 금광복공예에 조예가 깊은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머니와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린시절부터 동네에서 손재주가 있다는 평을 들었던 형제는 이후 함께 공예가의 길을 걸었다. 한지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한지로는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쉽게 손상될 것 같은 한지는 몇번의 과정을 거쳐 견고함을 지니게 된다. 한지는 조선시대 반짇고리, 바구니는 물론 요강까지 만들어 쓸 수 있었다는데…….한지조각가 금광복의 작업실에서 한지의 수없는 변신을 지켜봤다. 공예가 집안의 핏줄'한지로 못 만들 것은 세상에 없다' 고 자신있게 말하는 한지공예가 금광복의 작업실에는 도저히 한지로 만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다양한 생활용품들로 가득 차 있다.어린시절부터 무언가 만드는
꿈에 부처 만난 조선 불교조각 계승자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목조각장 허길양 허길양 목조각장은 불교조각장이라는 칭호가 더 걸맞는 인물이다.우연한 기회에 불교조각을 시작해 꿈에서 만난 부처를 그대로 조각으로 재현하면서 그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조선시대 불교조각의 계보를 잇고 있는 그는 오는 3월20일 첫 개인전을 앞두고 지난해 12월21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허길양 목조각장의 34년 조각 인생을 들어보자. 공예품 조각으로 34년 조각인생 첫발 그의 나이 열다섯 되던 해, 을지로의 한 공방에서 목형과 건축조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조각과 인연을 맺게 됐다.한 4∼5년 남짓 조각을 익히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찾아와 종 제작을 주문했었다. 그의 재주를 알아차린 주문자는 그에게 섬
삼대를 이어온 전통연 제작 서울시 무형문화재 지연장 이수자 노성규 예로부터 소원을 빌고 액운을 날려버리는 풍속으로 행해진 연날리기. 연은 세계적으로 분포된 문화유산인데 우리나라는 방패연이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지닌다.일제시대 전선 부근에서 연을 날리지 못하도록 형벌을 가하면서 명맥이 끊길 위기를 겪기도 한 연날리기는 한 집안에 의해 재건됐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지연장 노유상 옹(98)과 이수자인 노성규, 그리고 지금은 군에 있는 성규씨의 아들 순씨까지 3대에 이어 전통연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연을 가장 많이 날린다는 설날을 며칠 앞둔 날, 전통연 제작 현장을 찾았다. 아버지와 연, 그리고 나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연 제작을 보아온 그는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인 1971년 연만들기 장학생으로 입문했다
판, 각, 형의 예술 "판화" 판화가 홍선웅 “팔만대장경을 만든 조상들이 판각을 찍어내고 목판을 폐기했다면 훌륭한 문화유산이 후대에 전달되지 못했을 겁니다.” 첫 개인전인 ‘홍선웅의 판각기행전’에서 만난 홍선웅은 판각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힘찬 표지그림으로 유명한 홍선웅의 판, 각, 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항의 수단, 판화 20년이 흘렀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민중미술에 심취했던 홍선웅이 목판화를 시작한 것은 대중에게 전달되는 미술매체라는 점에서다.80년대 전·노 정권 휘하에서 부조리와 비민주적인 행태에 저항하는 운동의 수단으로 목판화는 활성화됐다.민족미술협의회 사무국장, 민족예술인총연합 국제국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조직위원장, 민족예술인총연합 대변인. 모두
도시 속 ‘소도’의 부활 솟대 대표 조각가 김남수 인사동 골목에 위치한 솟대.입구부터 친근한 소재들이 우리를 반긴다. 솟대, 장승, 장독, 온통 나무로 꾸며진 아늑한 공간.이곳은 조각가 김남수의 작업실이자 일반인들의 쉼터로 두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건네는 차 한잔에 온기를 느끼는 순간 벌써 그의 나무 이야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문패 만드는 아이 어린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손재주를 보인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네에 유명세를 떨쳤다.변변한 도구도 없이 연필 깎는 칼 한자루로 도장과 문패를 만들어 어른들에게 선물을 하곤 했는데 그것이 목재와의 인연이었다.중학교 시절에는 인천 사회복지회관에서 수출용품 제작을 위해 목공예를 가르쳤는데 여기서 조각을 배웠다. 70년대 중반에는 현재까지도 유일한 목공
자연 속에 동화된 나무 예술가 감자꽃 필 무렵 대표 이규석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 봉평 부근에는 또하나의 명소가 자리잡고 있다.강원도 평창 속사에 위치한 ‘감자꽃 필 무렵’은 상호만큼이나 독특한 정취를 지닌 카페이다.카페 대표이자 목조각가인 이규석씨는 이 카페를 직접 지었다. 탁자와 의자를 만들고 조명과 장식용품까지 인테리어의 전반적인 부분도 모두 손수 담당했다.특색있는 목재 인테리어를 갖춘 이색적인 카페 감자꽃 필 무렵을 찾았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각으로 단순히 카페 주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난 이규석씨는 목조각가란 호칭이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처음에는 단순히 자연이 좋았다. 산이 좋아 20년전 산 속으로 들어왔다. 돌, 나무, 바람 모든 자연이 좋다는 그는 산 속 화전민이 살
대나무가 빚는 천상의 소리인천시무형문화재 단소장 보유자 김환중 그의 단소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올해 여든 다섯. 어린시절 서당에 갔다가 훈장님으로부터 건네 받은 단소 하나, 소년은 틈나는 대로 단소를 불었다.어느덧 자라난 소년이 일제시대 징용에 끌려갈 때도 단소만은 가져갔다. 어엿한 가장이 된 이후에도 단소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식들조차 듣기 싫어했다는 그 단소 가락.김환중 단소장의 오늘이 있기까지 두 부자의 단소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들어보았다. 아버지의 단소가락과 함께 한 유년시절 충남 서천, 그곳에는 대나무가 자란다. 대가 자라는 마을에서 아버지의 시조와 단소가락을 들으며 자라난 단소장 김환중.전쟁중이던 어린 시절은 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