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는 100년이상 가업을 이어가는 전통있는 목재회사들이 많다.참 부럽고도 뿌듯한 일이다. 국내에도 드물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사의 맥을 이어가는 아들들이 있다. 국내 특수목의 선구자인 유성목재의 소수호 사장이 그렇다. 아버지 고 소재경 씨의 뒤를 이어 가업을 잇고 있는 유성목재 소 사장을 만나보자. 가업을 잇게 된 동기는 아버님이 워낙 목재업계에 유명한 분이셨다. 70년대 특수목 분야를 개척하셨는데 새로운 수종들을 들여와 상품화시키는 역할을 하셨다. 특수목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신 분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아들이 나는 정작 목재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가 되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게 되시면서 가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79년부터 목재일을 시작해 벌써 2
인천의 대표적인 산업을 말한다면 단연 목재산업이다. 목재가 산업을 주도하던 지난 시절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한때 인천 최고의 목재기업으로 자리잡았던 해안실업의 대표이사 이병묵 회장은 일련의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는 목재산업의 산증이다.목재 1세대로는 드물게 아직도 현장에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살아 있는 목재역사 이병묵 회장을 만났다. 목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인천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8년쯤 하다가 61년 에 ‘천일건재’를 창업했다. 한때는 인천의 남동염전이 폐지되면서 31만평을 구입해 3년동안 간척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2만평의 땅과 교환하는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다. 나의 성공과 실패의 인생은 그때부터 반복됐다.벽돌과 기와를 찍고 제재소를 겸하는 건재상
‘내것이다’‘내것이 아니다’라는 마인드 차이에 따라 엄청나게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다는데…….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은 주식을 실질화하여 직원들과 회사의 공동주인이 되어 기업을 운영해온 일이라는 풍산목재 유승봉 회장의 다음 계획은 국내에 DIY(Do it yourself)를 보편화시키는 일이다. 전공과 다른 목재업에 종사한 이유는장남이었기에 축산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축산을 전공했지만 한국무늬목(현 한국목재)의 최득수 회장을 만나면서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 70년대 특수목의 대부였던 최 회장 밑에서 5년을 일하면서 내 평생의 업이 결정됐다. 난 그분에게 엄청난 무형의 재산을 물려받았다.독립해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그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살아왔다.나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다누구나 그렇겠지
독일의 세계적인 인공림인 흑림을 본 충격이 지금껏 임업인생의 방향키가 되어주고 있다는 산림조합중앙회 박경 개발상무는 사유림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협업경영뿐이라고 말한다. 3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임업에만 혼신해온 그의 임업인생이 궁금하다. 임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계기는마냥 숲이 좋아서 임학을 전공한 것이 평생의 일이 됐다. 60년대 황폐한 숲을 보면서 일생을 걸고 복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독일로 연수를 갔을 때 임업에 대한 충격은 대단했다. 세계에서 가장 조림이 잘 되어있다는 흑림을 보면서 우리 임업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그간 어떠한 일들은 했는지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한 곳은 유엔 산하 한국산림조사 및 개발사업기구였다. 사방사업이 한창일 무렵 조림감독관의 역할을 했다.
“밥그릇이 커지면 담을 밥도 많아질 게 아닙니까?”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왜 그렇게 처음 시도를 많이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는 박찬규 사장. 업계 최초라는 말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며 회사의 이름과 같이 나무는 자연스레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장사꾼이 되지 말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신조로 20년을 CEO로 살아오면서 그가 겪은 삶의 이야기가 자못 진지하다. 목재와의 인연은 난 한번도 월급쟁이가 되어본 일이 없다. 늘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학창시절, 공부엔 취미가 없었지만 조숙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뭘해도 남과다르게 살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고 81년에 형님과 함께 흥일목재를 창업했다. 형님은 조언자이자 파트너이자 가장 존경하
빈손으로 미국에 건너가 최고의 마루전문가가 되기까지 그의 노력은 무모하기까지 했다. 영어한마디 못하면서 중고차 하나 끌고 길도 모르는 미국 대륙을 보름동안 횡단하면서 그가 꾼 꿈은 최고가 되겠다는 것. 그가 터득한 미국의 선진 마루기술을 국내에 보급하기 위해 전사로 입국한 피터 염 그가 들려주는 마루이야기. 미국에 건너가게 된 계기 미국 이민바람이 한참 불던 84년, 미국에 혼자서 이민을 갔다. 비자가 잘 안나오던 시절이었는데 20대 초반의 미혼남이었던 내 이민비자가 그렇게 빨리 나온 이유를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아마 내 운명이 그랬던 것 같다.컴퓨터를 공부하려고 바다를 건너갔지만 빈손으로 도착한 미국은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급한 곳이었다. 미국생활의 에피소드가 있다면 영어도 못하고 길도 모르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의 국가연구기관의 역할은 예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공영토 부장의 생각이다.이제 제품기술에 대한 연구는 민간 기업연구소로 옮겨가야 하며 연구원은 국민보호와 규제기술, 환경보전 연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데……. 연구원으로 오래 일했는데 대학 졸업후 연구원에서 일하다가 학위를 받은 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75년부터 연구원에 재직하면서 목재가공과장과 남부임업시험장장을 거쳐 올해 1월 임산공학부장으로 취임했다. 그간의 연구실적은색깔에 대한 연구를 5년정도 했었다. 목재의 색깔은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연구 후 청와대 관저 건립에 참여했는데 국산 소나무의 청변을 막아주는 일에 큰 몫을 했었다. 지금도 흐뭇한 일이다.가장 안타까운 연구는 1년정도 진행하
“목재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들겠다”는 포부로 45년을 하루같이 일했다는 홍성명 회장. 94년 명성목재 부도이후 재기를 위해 동터오는 새벽마다 한강을 달리고 또 달렸다는 그가 1년 뒤 재기에 성공해 진성산업에서 황혼의 인생을 불태우고 있다. 목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형제 많은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게 제재소였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어려운 시절이어서 누구든지 돈을 벌어야 했었다. 열일곱에 산판에서 원목 구입 일을 시작했다. 필리핀 나왕이나 미국산 제재목 등 수입일도 도맡아 했다. 늘 내가 사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하다 보니 이십대 초반에 이미 책임자가 되어버렸다. 젊은 나이에 책임자가 됐는데 책임감 있게 일하다 보니 사장에게 신뢰를
회사의 규모가 먼저냐 직원이 먼저냐를 항상 고민하게 되지만 언제나 가족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먼저한다는 박관서 사장.‘나중에 보자’는 말처럼 직원들을 힘빠지게 하는 말은 없다며 동업계 거의 두배에 가까운 임금을 지급하는 홈우드 박관서 사장의 경영철학을 들어보자. 직원에 대한 대우가 남다르다던데경영자라면 우선순위가 존재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직원들이 우선이다. 우리 회사가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순이익의 반은 언제나 직원들의 몫이라 생각하고 반드시 분배한다. 업계에서 가장 많은 임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타 회사의 두배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독립은 할지언정 동종업계로 옮겨가는 일은 없었다. 21명의 직원중 10년이상 근무한 직원이 절반이 넘을 정도로 장기근속이 일반화되어 있
아버지가 운영하던 제재소가 놀이터가 되어주던 어린 시절, 얼마든지 숨을 곳을 제공했던 목재더미와 나무로 만들 수 있는 온갖 장난감은 어린 그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려본 주택의 평면도로 가족의 살집을 지었던 아버지는 그의 능력을 인정해준 인생의 큰 교육자로 여전히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다. 서울대 임산공학과 이전제 교수의 흥미로운 인생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버지가 제재소를 운영하셨다던데 초등학교 시절 제재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제재소의 목재더미는 친구들과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이었다. 온갖 나무장난감을 만들기에 충분했던 나무들이 쌓여있던 제재소는 어린시절 가장 행복했던 공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무와 친숙해졌던 갔다. 나의 진로는 잠재의
70년대 초반 합판용재로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 목재로 맥주상자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30년동안 목재기업을 운영해온 김태규 사장은 철도침목과 바닥재를 관납하는 전문업체로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왔다. 육십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기업활동으로 노련함을 과시하고 있는 김태규 사장을 만났다. 맥주회사에 근무한 것이 창업의 계기라던데학교를 졸업하고 두산 오비맥주에 근무했었다. 자재를 맡고 있었는데 맥주회사의 자재 구매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맥주병과 상자였다. 당시만해도 지금처럼 플라스틱 상자가 아닌 목상자였다. 맥주상자라면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 괜찮은 아이템이라 생각됐다. 당시 작은아버지가 부산에서 제재소를 하고 계셨는데 이 아이템을 권유하고 오비맥주와 단독 공
겁도 없이 ??은 나이에 당시 이름도 생소한 IT업체를 설립하고 중소기업 정보화에 주력해온 이시현 사장. B2B 시범사업 선정에 28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목재업계에서는 흡족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심사에 참가한 60개 업종중 11개 업종에 선정되고 경쟁을 벌이던 3개의 컨소시엄에서 당당히 승자가 된 한맥인포텍 이시현 사장의 포부를 들어보자. 사업을 상당히 일찍 시작했는데대학을 졸업하고 소프트웨어 업체에서 1년을 근무하고 바로 사업을 시작했다. 전형적인 386세대로 학생운동을 해온 터라 취업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운동은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취업보다는 내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운동선상에 서있는 것이다. 당시 생소했던 IT업체를 창업한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