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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담당하는 분이 열쇠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김구 선생의 마지막 집무실인 ‘백범기념실’을 보기 위해 우리는 계단을 올라 병원 집기들이 여기저기 널린 어지러운 복도를 지나야 했습니다. 문이 열리고, 비록 복원된 공간이지만 왠지 선생이 집무하던 그 때의 공기가 그대로 담겨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들어선 양풍의 방은 어딘지 이상한 생김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운데 ‘목조로 짜여진 방’을 둘러 복도가 있고, 그 복도에 작은 집무용 책상이 놓인 ‘방 속의 방’ 구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속에 있던 방은 ‘일본식 도꼬노마와 수납이 붙은 8짝 다다미방’이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앉으셨던 책상과 의자 그리고 안두희의 저격장소인 만큼, 건축가인 나에게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처소가 다다미방이라는 것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경교장의 원래 이름은 죽첨장-다케조에소우입니다. 갑신정변을 지원한 바 있는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이 지금의 충정로 자리에 붙인 지명 다케조에..(竹添町)에서 유래합니다. 1938년에 지은 이 집은 일제시대 금광재벌인 최창학이란 자의 것으로 해방이 되자 눈치 빠르게 줄을 서서 자신의 집을 내놓은 것입니다. ‘조선과 건축’이라는 잡지에 소개된 사진을 보면 숲 속에 있는 듯 넓은 대지에 감싸여 뒤로 인왕산이 보이는 위풍당당한 저택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김구 선생은 이곳에 오자마자 집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거의 모든 지명이 일본화되었던 속에서, 대지 서쪽 경기감영(지금의 적십자병원) 앞 하천에 걸쳐져 있던 ‘경구교(京口橋)’를 찾아 경교장이라 붙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주관하고, 반탁운동과 조국 통일운동을 전개해 오면서 그 이름은 해방 후 한국 정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찾아온 안두희가 방에서 불현듯 일어 나 책상에 앉아 글을 쓰던 김구 선생을 향해 네 발의 총격을 가한 그 역사적 순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역도의 두 발자국은 선명히 다다미 위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생은 집 이름은 바꾸었지만 이 ‘기묘한 일식 공간’을 바꾸지 않았을까? 풀리지않는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가 봅니다. 그 곳에는 거대한 병원건물들로 둘러싸인 초라한 경교장이 다시 눈을 아 프게 합니다.선생이 서거한 후, 집의 소유주였던 최창학 은 다시 그것을 거두어 ?弩都? 그가 친일행위로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없습 니다. 그 후 외국 대사관과 미군부대 등 여러 주인을 거쳐 경교장은 지금에 이르게 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김구 선생이 원하던 진정한 독립과 통일이 이루어졌더라면, 미뤄두었던 경교장의 다다미방도, 무지덕지한 병원 건물도 없는 자랑스런 역사의 상징, 경교장을 우리는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글/사진_구가도시건축연구소 조정구 대표 2008년 11월 16일 제 2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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