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산림청 발족

○산림청 태동의 비화
지리산 도벌사건의 수사가 한참 진행중이던 1964년 12월 중순, 박정희 대통령이 탄 전용기가 대한해협을 지나 경북 포항의 영일만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파독 광부들을 만나고 일본을 경유해 귀국하는 길이었는데, 대통령의 눈에 비친 영일지구는 거대한 황무지였다. 벌거벗은 민둥산을 내려다보던 박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는데, ‘헐벗은 산을 그대로 두고 조국 근대화는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밥을 지어먹고 겨울을 이겨낼 땔깜조차 없는 현실이 문제였다. 춘궁기에 소나무 껍질로 죽을 만들어 먹으며 연명해 오던 조국의 오랜 가난을 어떻게 해결할 지 박 대통령은 답답하고 막막했다.

“나무를 많이 심으면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앞날에 대한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왔다”고 박 대통령은 말했다.

박 대통령은 1965년을 ‘일하는 해’로 정하고 나무 심기에 많은 예산을 편성했다.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일을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로 만들기로 했다. ‘치산녹화(治山綠花) 정책’이라 일컫는 거대한 국책 프로젝트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같은 해 8월 농림부 산림국은 ‘산림부’로 승격됐고 1966년 7월 ‘산림청 발족 법안’이 임시국회를 통과했으며, 이듬해 1월 마침내 산림청이 탄생했다.

초대 산림청장에는 김영진(金英鎭) 청장이 취임했다. 김 청장은 1월 9일 개청식을 갖고 치산녹화를 제 1목표로 청와대와 핫라인을 구축해 본격적인 나무심기와 사방사업에 들어갔다.

○산림청을 내무부로 옮긴 사연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나무심기 성공을 위한 새로운 각오를 밝히면서 “전국토를 녹화하기 위한 10개년 계획을 세워 우리 조국을 푸른 강산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선언은 산림청과 사전에 어떠한 협의도 거치지 않은 선언이었다. 대통령의 선언이 선포되고 사흘이 지난 1월 15일 산림청장 인사가 단행됐다.

당시 실세로 통하던 손수익(孫守益) 경기지사가 산림청장으로 부임했다. 신임청장 취임식이 있던 1월 16일은 마침 농림부가 대통령에게 국정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농림부 보고에서 산림녹화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일 뒤인 1월 22일 내무부 국정보고에서 박 대통령은 느닷없이 산림정책에 대해 신랄한 질책을 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산림청에 배정한 예산은 적었지만 효율적으로 지도해 나갔다면 산은 푸르러지고 나무는 많이 자랐을 것이다. 산림 공무원들의 자세도 고쳐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손 청장과 산림청 공무원들은 좌불안석이 됐다.

그로부터 20여일 후인 2월 13일, 충남도청에 순시차 잠시 들른 박 대통령은 갑자기 손 청장에게 도정보고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보고가 끝날 무렵, 박 대통령은 “산림청장 참석했소?”하며 확인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대통령의 귀경길에 손 청장도 따라나섰다. 대통령의 차량 행렬이 도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의 차가 멈춰섰다. 비서진이 차에서 내려 손 청장이 탄 차량으로 다가와 그를 대통령의 차로 옮겨타게 했다.

대통령의 차에는 김현옥(金玄玉) 내무장관이 동승하고 있었다. 차는 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침묵하고 있었는데 5분가량 지났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손 청장은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이때, 박 대통령이 “손 청장”하고 부르자 손 청장은 “네, 각하”하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은 무뚝뚝한 말투로 “산림청을 내무부로 옮길테니 최선을 다해 산림녹화를 이룩하세요. 김현옥 장관이 적극 도와줄테니 강도 높게 진행하세요”라고 말하며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산림청을 내무부 산하로 이관하는 작업은 급속도로 진행됐다. 1973년 2월 23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정부조직법이 통과됐고, 3월 3일 공포와 동시에 발족 6년만에 산림청은 내무부 산하기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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