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림목재 ⅳ
● 1990년 2월, 자회사 ‘신복산업’ 설립
1990년 2월, 영림목재 이경호 사장은 좀 더 부가가치를 높이는 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산 오리나무(Alder)를 주원료로 한 집성재 생산에 중점을 둔 ‘신복산업(주)’을 설립했다.
신복산업의 ‘신’자는 이경호 사장 모친의 성함인 강영신에서, ‘복’자는 부친 이영복 씨의 함자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신복산업 설립 초기에는 삼익악기와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기타의 몸체를 만들어 납품을 했다. 1994년도 들어서는 집성재 생산이 가격과 품질에서 타사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수출의 날에 100만불 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 1992년 11월, 본사를 남동공단으로 이전
영림목재는 도화동 본사를 청산하고 남동공단에 부지를 분양받아 공장과 사무실을 신축해 1992년 11월 남동공단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신축된 공장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반자동 제재기가 설치됐고, 미국 바이닝社로부터 60만불에 수입한 자동파렛트제작기 세트도 설치됐다.
남동공단은 처음에는 염전자리였는데 인천시에서 매립해서 분양했다. 남동공단 입주 시 분양사무소에서 추첨을 통해 장소를 정했는데 영림목재 자리는 제일 끝 쪽에 위치한 곳이어서 위치가 좋지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져서 아주 요지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 좋은 위치가 되고 있다.

● 동남아산 니아토 원목 국내 구입
영림목재는 북미산 원목(주로 특수목)은 직접 수입을 했지만 동남아시아산 특수목은 국내 구입을 주로 했다.
특히 동남아시아산 특수목 중에 니아토(일명 사구라) 원목은 (주)코마라는 수입상을 통해서 구매를 했다. 당시 필자는 코마라는 남양재 원목 수입상을 할 때였는데 두 달에 한 번 꼴로 니아토 원목을 1000~2000㎥씩 수입해 영림목재에 넘겨줬다. 말레이시아에서 배가 들어오면 하역을 한 후 니아토 원목만 별도로 쌓아서 영림목재에 팔았다.
가격은 시중 판매하는 가격보다 싸게 팔았지만 한꺼번에 파는 것이 코마로서는 큰 도움이 됐다. 당시에는 그 많은 니아토 원목을 어디에다 사용하는지 잘 몰랐는데 아마도 악기재와 부엌용 케비넷 문짝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1994년 어느날 영림목재 직원과 코마의 직원간의 유대관계를 갖기 위해 볼링시합이 열렸었다. 시합에서 진 편은 저녁을 사기로 했고 이긴 편은 볼링값을 내기로 했는데 당시 영림목재가 이겼다. 저녁식사에 영림목재 직원 6명과 코마의 직원이 모였는데 영림목재 여직원들의 술 실력이 대단해서 필자가 그 대작을 하느라 애를 먹었다.

● 1997년 1월, 신복산업 법인 전환
1997년 1월에는 신복산업을 법인화하고 20억원을 투자해 독일 바이닝社로부터 몰더를 도입하고, 인천 도화동 부지(대지 650평, 건평 305평)의 옆 공장과 뒷 공장을 사들여 공장을 1100평으로 확장했다. 신복산업은 이번 증설로 인해 기존 생산량의 두 배인 월간 700㎥의 생산체제를 갖췄고, 몇달 뒤에는 10억원을 추가로 투자해 월간 생산량을 1000㎥의 규모로 늘렸다.
당시에는 인테리어 내장재 고급화 추세가 확산될 때여서 소비자들은 MDF 소재로 만든 내장재보다 솔리드 원목 집성재를 선호했다.
신복산업은 증설을 통해 집성재 생산뿐 아니라 부엌가구용 목재도어도 생산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가구회사들의 가동율이 50% 정도에서 머물고 휴·폐업이 속출될 때였는데도, 주문량이 늘어나게 됐다. 신복산업이 첨단설비와 숙련된 기술력으로 튼튼한 제품을 생산한다는 점이 고객들에게 입소문을 타게 된 것이다. 당시 한샘, 보르네오, 리바트 등이 중요 바이어였다.

참고: <영림목재, 마흔 나이테>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한국목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