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산 원목수입의 선두주자, 국제상사

국제상사
1947년 부산에서 고무신 공장으로 출발한 국제상사(회장 양정모)는 1975년 종합상사가 되면서 상사 내에 목재사업부를 신설했다. 신설된 목재사업부는 당시 동명목재, 대성목재, 성창기업 등의 합판을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출했다. 뿐만 아니라 제재공장들의 원자재인 원목 수입에도 앞장섰다. 1980년 당시 소련(현 러시아)과는 국교도 안 된 상황에서 한국 최초로 소련산 원목을 수입해서 제재공장에 공급했다. 1979년 10월 국제상사에 입사해 소련산 원목 수입의 실무를 담당했던 이범수 씨(前 대한특수목재 대표)와 어렵게 통화를 했다. 국내 최초로 수입된 소련산 아스판(Aspan, 포플러나무의 소련명) 원목은 동해펄프(당시 동해펄프 무역부장 여영동 씨)의 수입의뢰로 이뤄졌는데 소련과는 국교가 안 된 상태라 일본의 수입상사를 통해서 수입을 했다.

국내 최초로 수입된 아스판 원목
국내 최초로 수입된 소련산 아스판 원목(포플러 나무)은 동해펄프에서 펄프재로만 사용하기는 아까울 정도로 직경이 큰 원목들이 많았다. 큰 원목들은 골라서 한양가구, 현대종합목재 등에 판매를 해 큰 이익을 보기도 했다.

당시 국내 포플러 원목은 거의 고갈된 시기여서 이쑤시개 공장, 성냥공장, 젓가락 공장 등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다음에는 전주(全州)에 있는 대한특수목재(대표 김한태)가 소련산 낙엽송을 수입해 주기를 원했다. 그때는 소련과의 무역경험이 있는 스웨덴 교포를 알게돼 그를 통해서 소련산 낙엽송을 수입했다. 당시 전국의 국민학교와 중학교들이 과밀학급(한 반에 학생수가 60명을 넘었다)으로 인해 새로 학교를 짓는 곳도 많았고 증축을 하는 곳도 많았다.

그때 전주 대한특수목재는 국민학교, 중학교의 복도 및 교실 바닥재로 낙엽송 후로링 보드를 납품했다. 스웨덴 교포는 소련 말에도 능통했고, 원목의 품질도 잘 알았다. 무역실무에도 밝았다. 낙엽송 오퍼도 그를 통해서 받았고 선적을 할 때는 그가 직접 소련에 들어가 검목도 했다. 뿐만 아니라 L/C도 스웨덴으로 열어 3국 무역을 했다.

창업주, 양정모 회장
국내 제재소들에게 원자재를 수입해 공급함으로써 우리나라 제재산업 발전에 기여했던 국제상사. 그 시작은 부산의 한 고무신 공장이었다. 1921년 부산에서 태어난 양정모 회장은 1947년(그의 나이 27세때) 부친 양태진 씨가 운영하는 정미소 한 켠에 고무신 공장을 차려 ‘국제상사’의 주춧돌을 놓았다. 1949년 회사이름을 국제화학주식회사로 바꾸고 1950년 중반에는 100개가 넘는 생산라인을 갖춘 세계적 신발 공장으로 발전했다.

1962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시장 수출에도 성공해 당시 수출이 살길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에 일조하면서 회사는 날로 발전해 나갔다. 당시 ‘왕자표 고무신’은 전국의 베스트셀러 고무신이었다. 1963년에는 신발류 및 비닐제품을 생산하는 ‘진양화학’을 설립했고, 1970년대에는 수출붐을 타고 성장을 거듭하면서 직물 가공업체인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을 설립했다. 1975년 종합상사로 지정돼 동서증권, 동우산업, 조광무역, 국제토건, 원풍산업 등을 인수하며 대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그룹의 외형이 커진 것은 1977년 연합철강을 인수하면서 부터였다. 연합철강을 인수한 국제상사는 모 기업인 국제상사를 비롯해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 그룹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1985년 전두환 정권 들어 그룹은 해체됐다. 1985년 2월,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은 ‘국제그룹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고, 국제그룹은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에, 국제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에, 나머지 계열사와 국제상사 사옥은 한일그룹에 각각 넘어갔다.

무리한 기업확장과 해외공사 부실 등이 그룹해체의 표면적 이유였지만 당시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부실기업정리’라는 미명하에 희생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국제그룹이 ‘재계 7위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3개월짜리 어음으로 10억원만을 정치자금으로 냈다, 청와대 만찬에 늦게 참석했다, 총선에서 양회장의 협조가 부족했다’는 등의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이후 정권이 바뀌자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해체는 부당하다며 위헌소송을 벌여 승소했지만 결국 그룹재건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1940년대 부산에 차린 고무신 공장으로 자수성가한 기업인 양정모 회장은 지난해 3월 29일,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노환에 따른 폐렴증상으로 별세(향년 92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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