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사를 설립한지 얼마 안돼서인데, 일본 유학시절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박찬빈 이란 친구가 설봉을 찾아왔다.

자기는 중국CIC(중국 군대의 비밀단체)의 책임자인 조자청과 손잡고 일하는데 ,중국에서 물건을 가지고 올테니 팔아 달라는 것이었다.

설봉은 그러마고 했더니 얼마 후에 그는 복사지 한 배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복사지는 그 당시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쉽게 팔 수 있었다. 그리고 복사지 대금조로 중석(重石)을 한 배 실어주었다.

그러니까 두 번 장사를 한 셈이었다.

당시 중석은 일본인들이 채광해 놓고 미쳐 실어가지 못한 것이 전국 곳곳에 방치 된 것이 많이 있었음으로 어렵지 않게 실어 줄 수 있었다.이것이 천우사의 첫 번째 큰 장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장사에서 설봉은 수백만원을 벌었다.

때는 1947년 여름쯤이었고, 천우사 간판을 건지 불과 3,4개월 밖에 안된 때였다.

그러나 매번 행운만이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초가을 쯤이었는데 봉명석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상해에서 신문용지를 구해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신문 용지가 아주 귀한 때라 천우사는 곧 그와 손을 잡고 신문용지 거래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신문용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설봉은 선금 600만원 외에도 동아일보의 600만을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서 모두 6000만원을 마련해 그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그가 상해로 돌아간지 석 달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명석은 그 돈을 모두 유흥비로 탕진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설봉은 자기 돈 600만원 뿐만 아니라 6000만원의 큰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천우사는 이때 완전 파산 상태에 빠지게 됐으며 이화재단 김활란씨에게서 빌린 돈 500만원의 밑천까지 전부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설봉은 날마다 빚 독촉을 받게 됐는데 하루는 모 명문학교 사친회 회장이 천우사 사무실을 찾아와서 ‘내 돈 500만원을 내놓으시오’ 안 내면 죽이겠다고 설봉의 멱살을 잡고 차마 입으로 할 수 없는 욕설을 마구 퍼부어 댔다.

이때 사원들이 달려들어 떼어놓긴 했으나, 이때 설봉이 받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옷을 찢긴 채 (조선일보)3층 천우사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있던 설봉은 ‘저기 전찻길에 뛰어내려 죽고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간부 사원들은 자칫하면 사장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의논 끝에 사장을 해외로 피신 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사장님 6개월 동안만 해외에 나가서 피신해 계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국내에서 뒷 처리를 할테니, 사장님은 해외에서 활약해 주십시오’ 하고 출국을 간곡히 권했다.

이리하여 설봉은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홍콩 행 비행기를 타게 됐다.

때는 1948년 4월 설봉은 해방 후 처음으로 해외에 나가게 됐던 것이다.

글 ; 김상혁 / shkim@woodconsult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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