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화국이 출범할 당시의 경제계는 극심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1962년 6·10화폐개혁, 2년간 계속된  흉작, 극심한 인플레이션, 외화부족에 따른 수입물자 부족 등으로 인하여 많은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해서 쉽사리 해결될 문제들은 아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63년 가을, 대성목재는 탈세혐의로 크나큰 곤욕을 치뤄야 했다. 사세당국으로부터 마치 탈세피의자처럼 근 한달동안 조사를 받았고, 국회국정감사에서는 수출을 빙자하여 달러를 할당받아서 수입한 자재를 수출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국내에 판매하였다는 혐의로 심문을 받기도 했다.

이때 설봉은 관계당국책임자들에게 경위를 설명할 수 밖에 없었는데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한 해는 어느덧 지나가고 1964년 새해를 맞게 되자 경향신문은 설봉에게 한국경제의 해결책을 물어왔다. 설봉은 1월14일과 15일 양일에 걸쳐 그 해법을 연제하였는데, 설봉은 이 글을 통해 제3공화국의 경제정책방향을 제시하였다.

이 글에서 설봉은 두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즉 소극적인 방법과 적극적인 방법 두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첫째로 소극적인 방법이란 물자를 절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도 채 안되는 한국인들이 2000달러 이상이나 되는 미국인들처럼 살아가려고 하니 이러한 의식구조를 가지고서야 어찌 경제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며 통탄하였다.

둘째로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생산확충, 고용증대, 수출증대, 외화획득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보세가공을 재삼 강조하였다. 일본, 영국, 덴마크, 스위스, 홍콩 같은 자원이 없는 나라들이 오히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남미제국들과 같이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들 보다 더 잘 살고 있는 실례를 들면서 보세가공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경제발전은 정부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국가는 전 국민이 잘 살겠다는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여 2700만 인구가 다 주먹을 쥐고 일어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만사는 사람이 기본이다. 기본되는 국민이 전체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 있더라도 성과는 나지 않을 것이다고 역설했다.

1964년 여름도 지나가고 가을이 되고 11월30일이 되자 우리나라의 수출액이 역사상 처음으로 1억달러를 넘게 되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할때만 해도 5480만 달러의 수출실적이던 것이 불과 2년만에 1억달러를 달성하였던 것이다.

정부당국은 1억달러를 깨트린 11월30일을 기념하고자 그 날을 ‘수출의 날’로 제정하여 매년 기념식을 갖고 수출 공로자들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제1회 수출의 날은 설봉에게도 매우 의미있고 경사스런 날이었다.

대성목재를 주축으로 하는 천우사가 사상최초로 대통령표창과 식산훈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합판이 단일품목으로는 가장 많은 수출액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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