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YMCA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함흥에서 8·15해방을 맞았을 때에도 함흥 YMCA 재건운동에 힘썼고, 부산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에 환도했을 때도 서울 YMCA이사가 돼 재건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후 1961년 서울 YMCA부이사장이 되고 나서는 회관재건을 책임지는 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서울 YMCA의 옛 회관은 매우 유서깊은 건물이었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실내체육관과 강당을 구비한 현대식건물이었으며 일정 때는 애국청년들의 유일한 집합처요, 배움터였었는데 아깝게도 1950년 공산군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958년 부터 서울 YMCA지도자들은 회관재건운동에 나서서 당시 서울 시장으로 있던 허정 씨를 초대재건위원장으로 추대했다가 4·19 이후 이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허정 씨에게 총무를 맡게 하고 재건위원장에는 설봉을 추대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 YMCA는 돈 한 푼 없었다. 다만 35만 달러 한도내에서 원조해 주겠다는 YMCA 국제본부의 약속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원조는 서울 YMCA가 국내에서 먼저 모금을 해야 주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돈이었다.

즉 서울 YMCA가 10만 달러에 해당하는 원화를 모금하면 10만달러를 원조해 주고 한 푼도 모금하지 못하면 단 1달러도 원조받을 수 없다는 조건이었다.

그러기에 설봉은 서울 YMCA 재건위원장이 되자 자신이 먼저 거액의 기부를 약속하고 일반 모금에도 앞장 서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우선 우리의 힘으로 착공이라도 해 놓고 보자해서 1961년 5월 20일에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 6월10일, 군사정부는 통화개혁을 단행했고, 모금운동에 차질이 생겨 더 이상 공사를 진척시킬 수 없었다.

1962년 여름, 설봉은 회사일로 미국에 갈 일이 생겼다.

이때 설봉은 미국 YMCA 국제본부에도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설봉은 떠나기 앞서 자신이 먼저 200만원의 기부를 약속한 다음 이병철 씨, 김용주 씨, 최태섭 씨 등을 비롯한 재벌급 경제인들로부터 거액의 기부금 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상세한 모금계획서를 작성했다.

설봉은 이 모금계획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사실 미국 YMCA국제본부는 35만 달러의 원조예산을 세워만 놓고 한국 YMCA 를 원조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했는데, 설봉과 같은 대기업인이 모금계획서를 가지고 와서 보여주니 즉각 원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1963년 부터 국제본부는 송금을 하기 시작했다.

송금을 받은 서울 YMCA는 그해 부터 공사를 재개해서 1966년에는 마무리 공사인 제5단계, 제6단계 공사까지 하게됐다. 즉 골조공사만 하고 내버려 뒀던 6, 7층 호텔 내부공사와 4, 5층 대여사무실 부분의 내부공사를 마무리 짓게 됐던 것이다.

드디어 1967년 4월15일, 그러니까 착공한지 실로 6년여만에 서울 YMCA는 새로 지은 건물에서 회관재건의 준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글 / 김상혁 shkim@woodconsult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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