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청은 올해 목재 수요량이 3,098만7,000㎥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중 자급률은 5.6%로 미미하다. 그만큼 수입의존도가 높다는 얘긴데…이처럼 부족한 목재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목재기업이 있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남 양산의 도림산업은 목질폐자재는 물론 폐목재를 재활용해 책상용 상판을 제작, 버려지는 목재를 훌륭한 제품으로 만들어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99년에는 국가 석탑산업훈장을 받았고 GR인증(우수재활용), 환경마크 등의 인증까지 받았다. 시골에서 태어나 나무에 대한 남다른 기억이 있는 도림산업의 도정락 대표는 환경이 황폐해 지는 것을 늘 안타까워하면서 사업초기부터 목재재활용을 구상해왔다. 사단법인 한국재활용품제조협회와 한국환경상품제조협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
윤여항교수는 올해로 모교인 홍익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은지 9년째가 되고 있다. 홍익대학교는 4년제 정규대학중에서 유일하게 목가구학과를 이끌고 있는 학교이며 그 동안에도 걸출한 재능있는 많은 제자들이 한국 가구업과 목가구업계에 포진하고 있다.한국 가구산업과 목가구 디자인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과 최신의 유행을 만들기위해 최전방에서 학생들과 가구산업을 이끌고 있는 윤교수를 만났다. 끊임없는 가구디자인의 인연 사람들은 대부분 직업을 갖게되면 그 업계나 계통에 계속 남는 경우가 많다. 또 대부분의 경우 공부와 연구, 그리고 취업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택하게 된다.그러나 윤교수의 경우에는 이런 모든 것들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려 했고 계속 성취해간 흔적을 그의 이력 곳곳에서 볼 수 있다.윤교수는 처음에 대학을
대학을 졸업하던 1960년대. 외대를 졸업한 김사장의 친구들 사이에는 외무고시를 통해 외무부나 대기업 해외 사업부에 취직하는 길이 비좁은 취업전장에서의 정도를 걷는 것이었다. 무역회사 입사를 희망하던 청년 김대웅도 궁극적인 목표는 그랬지만, 우선 임시라는 생각으로 목재회사에 입사하게됐다. 그래도 동명목재 등 일부 목재업체들이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때였기에 서슴없이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목재와의 인연이 지금껏 20여 년 이상 계속 되리라고는 전연 생각하지 못한 채 …. 중동 건설 붐이 가져 온 해외사업부의 매력 1970년대에 들어서자 세계의 이목이 중동으로 집중됐다. 이른바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10년 남짓 일했던 목재회사를 그만두고 김사장은 건설회사에서 3년이
매우 색다른 삶이 어울리지 않을 듯 하면서도 어울리는 사람, 사업, 교육, 봉사, 협회, 예술생활 등 너무도 많은 일들을 해온 31년생 남자. 교사에서 시작해서 건설회사, 목재회사를 창업하여 문화재보수 및 복원에 뜻을 두고 전념해 온 지 41년이 지난 지금. 우리 것의 소중함이 남다른 사람의 인생여정을 들어 보았다. 남도의 전통건축용 소재 생산의 메카 금남목재에 들어서는 순간 여느 제재소와 다를 바 없는 제재기와 지게차, 톱밥사이로와 원목저장고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깍고 다듬고 하는 목수가 눈에 띠고 어딘가에 쓰일 가구재가 쌓여 있었다. 사장실을 들어가는 2층 입구 한편에는 경축 ISO 9002 인증획득이라는 붉은 색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아주 공들여 제작된
지난해 11월 삼원산업주식회사는 자가 물류창고를 확보하면서 석남동의 대로변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사업을 시작한지 16년만의 일이다. 밖에서 보기에도 물류창고 안에는 자재들이 지붕까지 높게 쌓여 있었다. 78년부터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목재업계에 입사하면서 줄곧 목재산업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외길로 걸어온 25년 세월에 대한 보답이다. 다른 어떤 업계보다도 업체를 십년이상 이끌어가기 어려운 우리의 목재현실에서 삼원목재의 강정석대표가 걸어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산이 좋아서 시작하게 된 나무와의 인연처음 임학과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우선 산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그는 남들은 한두번 가기도 힘든 지리산을 스무차례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계곡과 바위들과 길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라고 말한
"보육학과 대학원에 최초로 남학생 입학"현재 서울교육대학교 교무과장을 역임하고 있는 곽노의 교수가 과거 모 중앙일간지 "이 달의 화제 인물"로 매스컴에 처음 데뷔했을 때의 뉴스 제목이다.1978년 무렵, 금식기도의 응답을 통해 남다른 일을 진로로 택하게 됐고, 급기야 보육학을 전공하기에 이르렀다는 그.그가 지금의 유아교육학 전공을 통해 금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지가 벌써 25년이다."분명 남자가 할 일도 따로 남겨져 있을 것"이라는 조언 그대로 우리나라 유아교육의 최초 남성 학도가 된 곽 교수를 만나 유아교육의 중요성과 목재를 소재로 한 놀이감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들어보았다. 기도의 응답을 통해 보육학 선택 당시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독일어교육학과 졸업반이던 곽 교수에게는 군대 제대와 함께 졸업을
아버지가 운영하던 산판과 제재소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문틀공장부터 가구제작 그리고 보드류와 표면재 대리점에서 독자 브랜드인 "미다지"를 만들기까지…민우의 김동일 사장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해왔다. 태어날 때부터 톱밥 냄새를 맡고 자란 사람강원도 화천 어느 산자락, 목재의 벌채가 한창이던 산판에서 김동일 사장의 유년시절 기억이 시작된다.어린 시절을 기억하려하면 톱밥 냄새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그와 목재는 무관하지 않았다.당시 강원도에서 아버지가 산판을 운영했기에 자연스레 나무와 함께 할 수 있었다는데…그의 산판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인 65년 가족 전체가 서울 응암동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재에 대한 그의 기억은 계속 이어진다.아버지는
아담과 이브가 누렸던 기원의 시대. 플라스틱, 자동차의 배기가스처럼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며 무한정 인기를 누리던 소재들은 이제 환경오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가장 큰 적이 돼버렸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지나친 욕심이 낳은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지속적이고도 친환경적 자원으로 목재가 최근 사회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인공적 요소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이상적 천연의 상태를 목재 문화의 재건과 부흥에서 꾀하려는 심지 굳은 연구자 한사람을 찾아 우리의 처한 현실과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현재의 연구직으로 종사하기까지 대학졸업 후 교수님들의 추천으로 목재업체나 해외산림개발업체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당시는 목재산업의 호황기였다. 그러나 생각 끝에 가장 월급이 적었던 임업시험장(현재 임업연구원)
우리들 모두에게 깊이 각인돼 있고, 지금도 누구나 두려워하고 있는 외환외기 때도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사람이 있다. 물론 그런 일들이 다 지난 후인 지금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찌됐던 하윤규 사장의 아이엠에프는 남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목재를 접한지 삼십년이 넘는 그의 인생역경과 경영철학을 들어보았다. 목재관련 사업이 운명처럼 하사장의 처음 진로는 목재쪽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장학금을 받으며 들어간 곳은 지금은 ‘경상대학교’인 진주농대 임학과였다. 졸업 후 고향서 멀지않은 중학교에서 교직에 몸을 담은 적도 있었으나 이 또한 제 갈길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대학원에 들어가 학문의 길로 들어섰으나 점점 가슴속에 더해만가는 생각은 산업현장에 들어가 봐야겠
한창 혈기왕성하던 30대초반을 열대림 개발을 위해 정글에서 원주민과 보내고 국내외에 조림업무를 담당하며 어느덧 40년의 세월을 목재와 함께 보냈다.국내 목재산업의 역사를 고스란히 체험한 부이택의 허남주 대표는 이제 건조기와 방부주약관의 국내 공급에 앞장서고 있다.가공기술에 비해 건조와 방부기술이 취약한 국내 실정이 안타까웠다는 그에게 국내 목재산업의 과거와 앞으로 그가 준비하는 건조 · 방부산업에 대한 미래를 들어보았다. 서울 농대 임학과 59학번 참으로 까마득한 나이다. 59년에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하고 한번도 목재 이외의 일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허남주 대표가 이제 40년동안 몸소 겪어온 목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임학을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해가 65년이다. 졸업한 그해에는 UN산림조사기구에
한국가구학회는 산업계와 학계, 일반학생들을 중심으로 가구재료 및 디자인 개발에 대한 발전을 꾀하기 위해 13년이라는 짧지 않은 역사동안 묵묵히 노력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대외적인 관심의 밖에 있던 한국가구학회가 지난여름, 권 교수의 학회장 취임 후 큰 변화를 맞고 있다. 학회의 활성화를 위한 홈페이지가 개설되고, 학회지 발행 횟수가 연3회로 늘면서 학회에 대한 회원들의 참여도가 높아졌다. 이를 계기로 학회에 대한 한쪽으로 편중됐던 연구논문도 재료와 디자인 분야에서 비등할 정도로 고루 발표됐었다. "아직은 변화의 시작일 뿐…, 한국가구의 산학공동발전을 위해 학회가 갈 길은 아직 멀다"며 겸손함을 잃지 않던 권 교수. 그에게 한국가구학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들어보았다. 한국가구학회/장 취임 후 소감은
1468년 6월,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직접 이곳을 둘러보고 능터를 정한 이후, 경작과 매장은 물론, 조선시대 500여년동안 풀 한 포기 뽑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보호지역 광릉숲에 자리잡고 있는 국내 유일의 국립수목원이며, 가장 오래된 국내의 수목원인 광릉의 국립수목원을 찾았다. 아침공기가 시원하게 차창으로 들어오는 국내 숲의 보고(寶庫)에서 수목원장으로 부임한지 4개월이 지난 김남균 국립수목원장을 만났다. 광릉 국립수목원장의 부임 후 느낌은?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73년도의 일이다. 당시 대성목재는 수출훈장을 받을 정도로 잘되고 있던 시대이고 여기에서 현재의 김낙기사장과도 만났다. 둘은 입사동기이고 룸메이트 였으며, 현재까지 함께하고 있는 30년지기의 친구가 되었다. 이때 만난 많
처음 목재를 만나게된 것이 30년전이니 결코 짧지않은 목재인생이다. 원목을 고르면서 시작한 일은 이제 세월이 흘러 판상재의 판매가 점차 주력이되고 있는 삼산실업은 절친한 동료인 김낙기 공동대표와 함께하고 있다. 목재인생 반평생을 걷고있는 김광채 대표를 만나보았다. 고향의 향수가 느껴지는 목재산업 “아주 어릴적의 고향이 생각납니다. 고향 뒷편에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예전에 고향땅 전남 광양에는 집안의 대나무밭이 있었는데 ‘생금(生金)밭’이라고 하여 대나무가 금을 생산하듯 쓰임새가 많고 값어치가 많다는 말이였습니다.” 여느 시골소년의 마음속에는 나무라는 것이 그저 자주만지고 보고,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법 나름대로의 생산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런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김광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목재 수출국가이지만 한국과의 목재 교역량은 미미한 편이다. 그러나 매년 목재 교역량이 늘고 있다는 점은 두 국가간에 목재하는 연결고리가 점차 견고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중국, 홍콩 등을 거쳐 이제 한국에 온지 두달남짓 됐다는 오스트리아대사관의 베르너솝베버 상무참사관을 만나 양국간 목재무역에 대한 전망을 이야기했다. 한 · 오스트리아간 무역규모는.한 오스트리아간 교역량은 총 3억7,500만 유로에 달한다. 한국은 오스트리아에 올 상반기에 2억1,900만 유로를 수출했고 오스트리아의 대한국 수출은 1억5,600만유로 였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의 수출량이 1.4배정도 더 많다. 이는 전년도에 비해 14%이상 증가된 규모로 교역량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한 · 오스트리
목재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고민하여, 의논하는 열정과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국내 최초의 목재관련 실험실 벤처기업 우드택(주)를 설립한 국립익산대학 박희준교수를 만나 그의 연구성과와 산,학의 협력 방안을 들었다. 국내 목재관련 최초의 실험실 벤처창업을 하였는데1998년 10월 국립익산대학 내에 우드택(주)를 설립했다. 설립배경은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상품화하고자 고민하던 가운데 마침 정부에서 벤처기업육성에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면서 대학내에도 기업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고 당시가 IMF로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신규 사업에 투자하고자 하는 기업을 찾지 못하던 상황에서 직접 상품생산까지 해 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우드택(주)의 주된 생산제품은 목제욕실, 목제타일과 목제욕조 등이었으며, 연구과정
고무신 신고 미국에 목재를 사러가는 사람, 직원들과 같이 늘 작업복 차림에 땀을 흘리는 사장, 평산의 신현문 대표는 엉뚱하지만 "난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 싶다.소재를 생산하는 회사에다 첨단소재도 아닌 목재 무늬목을 생산하면서 벤처 인증을 받고 보유한 특허만 3개, 의장등록만 6개에 이르는 겁 없는 회사를 일으킨 신현문 대표를 만났다. 건식무늬목 시대 앞당겨 친지가 목재 일을 하고 있어 목재업계에 종사하게 된 평범한 이력과 달리 신현문 대표는 다른 목재인들이 이루지 못한 것들이 과감히 이뤄낸 사람이다.무늬목 매장에서 일하면서 창업을 꿈꿀 때 그는 이미 건식 무늬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기존의 습식을 권유했지만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평산을 설립하면서 그
캐나다 브티티시 콜롬비아주는 캐나다 내에서도 목재관련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이 지역의 목제품 회사들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BC Wood가 한국 시장 진출을 위해 나섰다. 이에 지난달 14일 한국을 방문한 BC Wood의 에릭 디그르트 일본 대표를 만나 향후 한국 시장 진출 계획을 들어보았다. 한국 방문 이유는.한국에서의 사업논의와 드림사이트코리아(대표 이광훈)에서 미국?캐나다 건축 견학단을 구성했는데 이들이 BC Wood의 회원사인 딕스 럼버와 바이스로이 홈스라는 두회사를 방문키로 해 이에 대한 조율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일본 진출 시기와 성과는. 일본으로의 수출은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으나 일본에 사무소를 개설한 것은 98년이다. 일본은 BC Wood 회원사들로부터 매년 1억 4,000만달러(
올해는 한중수교 1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과 한국 모두에 기념적인 해이다.수교 첫해인 92년 교역량 50억달러에서 지난해 359억달러로 양국간 교역도 지난 10년간 크게 증가했다.최근 중국은 일본을 누르고 아시아 최대 침엽수 수입국가로 급부상했으며 남양재 수입은 세계 2위로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대 목재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국산 목제품의 수입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며 목재회사들의 대중국진출도 이어지고 있다.중국의 벌채규제로 중국산 홍송, 자작 등의 수급이 어려워지고 있는 점도 국내 제조업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국내 목재산업을 중국을 제외하고 논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시점이다.중화인민공화국 주대한민국대사관 리 샤오 칭 경제상무에게 중국의 목재산업에 대해 들어보았다. 7
나무를 가장 실용적이고 아름답게 실생활에 적용하는 방법, 김낙중 교수는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사람이다."꼭 나무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다른 소재와의 어울림, 적재적소에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나무의 미학과 용도를 가장 잘 찾아주는 일이죠"목조건축기술협회가 건설교통부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으면서 목조건축물에 대한 인식은 새로이 정의되고 있다. 사우디를 비롯한 세계는 김낙중 교수의 주 활동무대였다. 적어도 그가 학업을 계속하기 전까지는.현대건설에서 해외설계실에서 근무하고 이후에도 해외에서의 그의 행보는 계속됐다. 각 대학에서 강사로 나섰고 그때까지만해도 그가 다른 일을 할만큼 무모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건설회사에서 퇴직한 후 설계사무소를 창업한 그는 한창 설계사무실
"경영자가 이익을 못 내면 그것은 곧 범죄행위다"라는 말을 경영철학으로 삼고 사는 사람. 경제수종을 키우기 위해 해외조림이라는 과감한 방법을 단행한 사람. 말단직원부터 30년을 샐러리맨으로 한 직장에 몸담다가 드디어 최고경영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하지만 이런 그에게 사회 초년시절 늘 따라 다니던 꼬리표는 "저 능력 없는 놈"이란 소리였다.인류에 도움이 되는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대표이사 취임 5개월째를 맞고 있는 한솔포렘 유명근 대표이사를 만났다. 일요일에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빨간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을 했던 엉뚱한 신입사원, "우리 빌딩에 저런 놈도 있나?"며 모두들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봤다.30년 전, 삼성그룹 공채에 합격해 전주제지로 발령 받은 그는 "일만 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