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 하나의 생명체다. 혼이 없는 기업은 생명이 없는 기업이기 때문이다.”선창산업의 정해수(77세) 회장의 말이다.선창산업은 지난 1959년 창업, 45년 간 끊임없는 변화와 격동 속에서도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자만하지 않으며 겸손한 자세로 의연히 합판업계를 지켜가고 있는 기업이다. 정 회장을 회장실에서 만나 그의 사업관과 기업의 성장배경을 들어봤다. 성창기업은 우리나라 합판산업을 일으킨 기업으로 알고 있는데 태동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선친께서 일제시대 때 봉화에서 삼척탄광에 갱목을 납품한 것이 목재사업의 시작이었다. 합판공장을 한 것은 해방 후인 1948년으로 대구에서다. 일본인 기술자가 만든 합판기계를 사서 대구에 합판공장을 세운 것이 합판사업의 시작이었다.그때는 춘양목으로
삼산실업 김광채 사장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동업 사장인 김낙기 사장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그거 좋지요”하며 쾌히 김낙기 사장을 바꿔준다. 김낙기 사장은 선뜻, “제가 뭐 할말이 있어야 지요”하며 겸손해 한다.2월6일 기자가 김낙기 사장을 찾아 삼산실업 정문에 도착했을 때 커다란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 한대가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합판을 부리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김낙기 사장과 김광채 사장이 반갑게 기자를 맞이한다. 과거 대성목재에 같이 근무했던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업을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요? 그때 개업식에 참석했었는데 ….김 사장이 삼산실업의 창업초기의 아득한 기억을 떠올린다.“87년 10월입니다. 그때 연안부두 대한창고 옆에 조그만 사무실 하나를 얻어 여직원 한명
산림청은 올해 목재 수요량이 3,098만7,000㎥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중 자급률은 5.6%로 미미하다. 그만큼 수입의존도가 높다는 얘긴데…이처럼 부족한 목재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목재기업이 있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남 양산의 도림산업은 목질폐자재는 물론 폐목재를 재활용해 책상용 상판을 제작, 버려지는 목재를 훌륭한 제품으로 만들어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99년에는 국가 석탑산업훈장을 받았고 GR인증(우수재활용), 환경마크 등의 인증까지 받았다. 시골에서 태어나 나무에 대한 남다른 기억이 있는 도림산업의 도정락 대표는 환경이 황폐해 지는 것을 늘 안타까워하면서 사업초기부터 목재재활용을 구상해왔다. 사단법인 한국재활용품제조협회와 한국환경상품제조협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
매우 색다른 삶이 어울리지 않을 듯 하면서도 어울리는 사람, 사업, 교육, 봉사, 협회, 예술생활 등 너무도 많은 일들을 해온 31년생 남자. 교사에서 시작해서 건설회사, 목재회사를 창업하여 문화재보수 및 복원에 뜻을 두고 전념해 온 지 41년이 지난 지금. 우리 것의 소중함이 남다른 사람의 인생여정을 들어 보았다. 남도의 전통건축용 소재 생산의 메카 금남목재에 들어서는 순간 여느 제재소와 다를 바 없는 제재기와 지게차, 톱밥사이로와 원목저장고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깍고 다듬고 하는 목수가 눈에 띠고 어딘가에 쓰일 가구재가 쌓여 있었다. 사장실을 들어가는 2층 입구 한편에는 경축 ISO 9002 인증획득이라는 붉은 색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아주 공들여 제작된
한창 혈기왕성하던 30대초반을 열대림 개발을 위해 정글에서 원주민과 보내고 국내외에 조림업무를 담당하며 어느덧 40년의 세월을 목재와 함께 보냈다.국내 목재산업의 역사를 고스란히 체험한 부이택의 허남주 대표는 이제 건조기와 방부주약관의 국내 공급에 앞장서고 있다.가공기술에 비해 건조와 방부기술이 취약한 국내 실정이 안타까웠다는 그에게 국내 목재산업의 과거와 앞으로 그가 준비하는 건조 · 방부산업에 대한 미래를 들어보았다. 서울 농대 임학과 59학번 참으로 까마득한 나이다. 59년에 대학에서 임학을 전공하고 한번도 목재 이외의 일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허남주 대표가 이제 40년동안 몸소 겪어온 목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임학을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해가 65년이다. 졸업한 그해에는 UN산림조사기구에
1468년 6월,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직접 이곳을 둘러보고 능터를 정한 이후, 경작과 매장은 물론, 조선시대 500여년동안 풀 한 포기 뽑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보호지역 광릉숲에 자리잡고 있는 국내 유일의 국립수목원이며, 가장 오래된 국내의 수목원인 광릉의 국립수목원을 찾았다. 아침공기가 시원하게 차창으로 들어오는 국내 숲의 보고(寶庫)에서 수목원장으로 부임한지 4개월이 지난 김남균 국립수목원장을 만났다. 광릉 국립수목원장의 부임 후 느낌은?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73년도의 일이다. 당시 대성목재는 수출훈장을 받을 정도로 잘되고 있던 시대이고 여기에서 현재의 김낙기사장과도 만났다. 둘은 입사동기이고 룸메이트 였으며, 현재까지 함께하고 있는 30년지기의 친구가 되었다. 이때 만난 많
처음 목재를 만나게된 것이 30년전이니 결코 짧지않은 목재인생이다. 원목을 고르면서 시작한 일은 이제 세월이 흘러 판상재의 판매가 점차 주력이되고 있는 삼산실업은 절친한 동료인 김낙기 공동대표와 함께하고 있다. 목재인생 반평생을 걷고있는 김광채 대표를 만나보았다. 고향의 향수가 느껴지는 목재산업 “아주 어릴적의 고향이 생각납니다. 고향 뒷편에 대나무 밭이 있었는데, 예전에 고향땅 전남 광양에는 집안의 대나무밭이 있었는데 ‘생금(生金)밭’이라고 하여 대나무가 금을 생산하듯 쓰임새가 많고 값어치가 많다는 말이였습니다.” 여느 시골소년의 마음속에는 나무라는 것이 그저 자주만지고 보고,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법 나름대로의 생산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런 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김광
목재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고민하여, 의논하는 열정과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국내 최초의 목재관련 실험실 벤처기업 우드택(주)를 설립한 국립익산대학 박희준교수를 만나 그의 연구성과와 산,학의 협력 방안을 들었다. 국내 목재관련 최초의 실험실 벤처창업을 하였는데1998년 10월 국립익산대학 내에 우드택(주)를 설립했다. 설립배경은 그 동안의 연구결과를 상품화하고자 고민하던 가운데 마침 정부에서 벤처기업육성에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면서 대학내에도 기업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고 당시가 IMF로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신규 사업에 투자하고자 하는 기업을 찾지 못하던 상황에서 직접 상품생산까지 해 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우드택(주)의 주된 생산제품은 목제욕실, 목제타일과 목제욕조 등이었으며, 연구과정
고무신 신고 미국에 목재를 사러가는 사람, 직원들과 같이 늘 작업복 차림에 땀을 흘리는 사장, 평산의 신현문 대표는 엉뚱하지만 "난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 싶다.소재를 생산하는 회사에다 첨단소재도 아닌 목재 무늬목을 생산하면서 벤처 인증을 받고 보유한 특허만 3개, 의장등록만 6개에 이르는 겁 없는 회사를 일으킨 신현문 대표를 만났다. 건식무늬목 시대 앞당겨 친지가 목재 일을 하고 있어 목재업계에 종사하게 된 평범한 이력과 달리 신현문 대표는 다른 목재인들이 이루지 못한 것들이 과감히 이뤄낸 사람이다.무늬목 매장에서 일하면서 창업을 꿈꿀 때 그는 이미 건식 무늬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기존의 습식을 권유했지만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평산을 설립하면서 그
나무를 가장 실용적이고 아름답게 실생활에 적용하는 방법, 김낙중 교수는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사람이다."꼭 나무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다른 소재와의 어울림, 적재적소에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나무의 미학과 용도를 가장 잘 찾아주는 일이죠"목조건축기술협회가 건설교통부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으면서 목조건축물에 대한 인식은 새로이 정의되고 있다. 사우디를 비롯한 세계는 김낙중 교수의 주 활동무대였다. 적어도 그가 학업을 계속하기 전까지는.현대건설에서 해외설계실에서 근무하고 이후에도 해외에서의 그의 행보는 계속됐다. 각 대학에서 강사로 나섰고 그때까지만해도 그가 다른 일을 할만큼 무모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건설회사에서 퇴직한 후 설계사무소를 창업한 그는 한창 설계사무실
까다로운 일본에 제재목을 10년 가까이 수출했다면 품질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목재는 수입만 하는 줄 안다면 오산이다. 비록 원자재는 수입하지만 역수출을 통해 국내 목재산업의 옛 신화를 되찾고 있는 대경종합목재 민윤식 사장을 만났다. 목재업에 몸담은 지 25년, 적지 않은 세월이다. "나무가 좋아서 일을 배웠습니다. 무역으로 시작해서 생산과 영업까지 두루 거치면서 창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그는 상당히 솔직했다. 목재는 사업하기 편한 아이템이라고 말한다. 소를 부위별로 팔 듯이 목재도 용도에 맞게 판매할 수 있는 점이 그가 목재업을 택한 이유다. 14년 전 창업한 이후 가장 어려웠던 일을 묻는 질문에 "이 일을 끝날 때까지는 계속 힘들 것 같습니다. 끈이 느슨해지면 그만큼 퇴보하는 것
“자원을 다루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는 세실의 이원규 사장은 90년대 인도네시아 합판 수입의 창구가 세실로 일원화되면서 국내 합판 생산량보다 많은 수입량을 통솔해 중소기업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목재와의 인연은 난 엔지니어 출신이다. 합판을 생산하던 동명합판의 무역팀이 분사되면서 유림교역이 설립돼 서울사무소장으로 입사했다. 유림교역은 부산에 본사를 두었으며 서울, 홍콩, 싱가포르, 자카르타에 각각 지점을 두고 있었다.당시 대성목재의 합판설비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수리해 수출하면서 엔지니어링을 담당했는데 그것이 대성목재와 인연이 되어 MDF, PB, 마루판, 태고합판라인과 수지공장 설비를 담당하게 됐다. 인천에서 내가 한일 중 가장 큰 일이라 할 수 있는 이 일을
인천의 대표적인 산업을 말한다면 단연 목재산업이다. 목재가 산업을 주도하던 지난 시절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한때 인천 최고의 목재기업으로 자리잡았던 해안실업의 대표이사 이병묵 회장은 일련의 사실을 증명해줄 수 있는 목재산업의 산증이다.목재 1세대로는 드물게 아직도 현장에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살아 있는 목재역사 이병묵 회장을 만났다. 목재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인천시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8년쯤 하다가 61년 에 ‘천일건재’를 창업했다. 한때는 인천의 남동염전이 폐지되면서 31만평을 구입해 3년동안 간척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2만평의 땅과 교환하는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다. 나의 성공과 실패의 인생은 그때부터 반복됐다.벽돌과 기와를 찍고 제재소를 겸하는 건재상
“밥그릇이 커지면 담을 밥도 많아질 게 아닙니까?”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왜 그렇게 처음 시도를 많이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는 박찬규 사장. 업계 최초라는 말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했다며 회사의 이름과 같이 나무는 자연스레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장사꾼이 되지 말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신조로 20년을 CEO로 살아오면서 그가 겪은 삶의 이야기가 자못 진지하다. 목재와의 인연은 난 한번도 월급쟁이가 되어본 일이 없다. 늘 남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학창시절, 공부엔 취미가 없었지만 조숙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뭘해도 남과다르게 살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고 81년에 형님과 함께 흥일목재를 창업했다. 형님은 조언자이자 파트너이자 가장 존경하
“목재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들겠다”는 포부로 45년을 하루같이 일했다는 홍성명 회장. 94년 명성목재 부도이후 재기를 위해 동터오는 새벽마다 한강을 달리고 또 달렸다는 그가 1년 뒤 재기에 성공해 진성산업에서 황혼의 인생을 불태우고 있다. 목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형제 많은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나선게 제재소였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어려운 시절이어서 누구든지 돈을 벌어야 했었다. 열일곱에 산판에서 원목 구입 일을 시작했다. 필리핀 나왕이나 미국산 제재목 등 수입일도 도맡아 했다. 늘 내가 사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하다 보니 이십대 초반에 이미 책임자가 되어버렸다. 젊은 나이에 책임자가 됐는데 책임감 있게 일하다 보니 사장에게 신뢰를
70년대 초반 합판용재로 사용하고 남은 자투리 목재로 맥주상자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30년동안 목재기업을 운영해온 김태규 사장은 철도침목과 바닥재를 관납하는 전문업체로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왔다. 육십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기업활동으로 노련함을 과시하고 있는 김태규 사장을 만났다. 맥주회사에 근무한 것이 창업의 계기라던데학교를 졸업하고 두산 오비맥주에 근무했었다. 자재를 맡고 있었는데 맥주회사의 자재 구매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맥주병과 상자였다. 당시만해도 지금처럼 플라스틱 상자가 아닌 목상자였다. 맥주상자라면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 괜찮은 아이템이라 생각됐다. 당시 작은아버지가 부산에서 제재소를 하고 계셨는데 이 아이템을 권유하고 오비맥주와 단독 공
겁도 없이 ??은 나이에 당시 이름도 생소한 IT업체를 설립하고 중소기업 정보화에 주력해온 이시현 사장. B2B 시범사업 선정에 28개 컨소시엄을 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목재업계에서는 흡족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심사에 참가한 60개 업종중 11개 업종에 선정되고 경쟁을 벌이던 3개의 컨소시엄에서 당당히 승자가 된 한맥인포텍 이시현 사장의 포부를 들어보자. 사업을 상당히 일찍 시작했는데대학을 졸업하고 소프트웨어 업체에서 1년을 근무하고 바로 사업을 시작했다. 전형적인 386세대로 학생운동을 해온 터라 취업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운동은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취업보다는 내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운동선상에 서있는 것이다. 당시 생소했던 IT업체를 창업한 까
신기술 · 신소재로 보급에 힘쓰는 헤펠레 목공학교2001년 개교이후 지금까지 3차례의 수료과정을 치러낸 헤펠레 목공학교는 목공분야 현장직종사자들에게 기능성 하드웨어를 알림으로써 목공기술의 발전을 꾀하는 밑거름을 마련해 오고 있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헤펠레만의 작은 노력이 시작되는 곳,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에 위치하고 있는 헤펠레 목공교실을 찾아보았다. 목공인력 늘려 하드웨어 이용 확대헤펠레 목공학교의 모채는 설립 8년째 독일의 기능성하드웨어를 전문공급하고있는 (주)헤펠레코리아이다. 헤펠레 목공학교에서는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는 새로운 기능성 하드웨어와 각 종의 신소재를 이용, 수강생들로 하여금 의도하고 있는 작품을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테크
올해로 설립 7년을 맞이하는 "내가 다자인하고 내가 만드는 가구"(이하, 내디내만)는 서울 본사 및 일산 공장과 함께 전국 7개 중 · 소도시에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두고 운영하는 DIY 기업이다.내디내만은 본사 및 동호회를 중심으로 온라인 · 오프라인 회원들이 가구에 대한 관련지식과 기술정보를 습득하고 있으며, 각 지방의 가맹점을 통해서도 디자인에 관련된 아이템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특히 일산공장에서 매주 운영되고 있는 워크샵과 강사반 및 전문가반으로 나뉘는 실기 교육과정을 통해 디자인, 공구다루는 법, DIY 샵 전문경영인이 되기 위한 영업기술을 포함 원재료 구입부터 사업경영, 제품 제작의 기술보급까지 두루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 실질적인 목공기술 보급에 앞장서는 업체이다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지닌 회사부터 신생회사까지 가좌동은 최소 3세대 이상의 목재업체들이 모여있다.인천지도 가운데 선명하게 쓰여진 목재단지라는 말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찾아간 가좌동은 봄철 성수기를 맞아 일손이 바쁘다.목재경기에 대한 흐름과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는 이곳은 목재가 있는 한 영원히 지속될 목재단지일 것이다. ▶ (주)일광팀버 / 박성준 대표 소송만 고집하는 젊은 제재소 ( Tel : 032-572-5123 )소송 전문 제재소인 일광팀버는 99년 설립된 젊은 제재소다.일광의 박성준 사장은 흔히 30~40대가 선호하는 아이템인 IT나 무역보다 삶의 현장감과 무게감이 있는 제재소를 택했다.그는 한창 벤처붐이 일기 시작하던 무렵 온라인 화장품 쇼핑몰에도 근무했었다. 그러나 실물과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