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물이 풍요로운 청풍명월의 고장 단양,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에 위치한 황정산(959m)은 한국 100대 명산 중 하나이다. 황정(黃庭)이란 옥황상제가 근무하는 광한루 앞마당이란 뜻으로 하늘의 정원같이 아름다운 산이라 하여 황정산이라 불린다. 황정산은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단양 제2팔경의 1경으로 손꼽히는 칠성암과 신라시대에 창건된 천년고찰인 대흥사와 원통암으로 유명한 산이다. 그 자락에 조용히 자리 잡은 황정산자연휴양림은 청정계곡과 수려한 산세 속에서 산림휴양을 즐길 수 있는 웰빙공간이라 할 수 있다.황정산자연휴양림에서는 이용자들에게 숲과 자연환경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달하고 올바른 숲 탐방 및 숲 체험 방법을 안내하기 위해 숲 해설을 실시하고 있
도갑사는 전라남도 영암의 월출산 남쪽기슭에 자리 잡은 절이다. 신라 말에 도선 국사가 짓고 고려후기에 크게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에 의하면 도갑사는 661년 신라 무열왕대에 창건되었고 신라 말 고려 초 도선 국사에 의하여 크게 중흥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해탈문이 절의 입구에 서 있다. 도갑사의 사역(寺域)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하천이 있고 이를 건너 해탈문의 옆으로 진입하게 된다. 도갑사 해탈문은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으로, 1960년 보수 때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어, 1457년 중건을 착수하여 1473년 완공되었음이 밝혀졌다. 해탈문은 불전 바로 앞에 세우는 문으로 불이문(不二門)의 다른 이름
나막신‘나막신’은 나무로 만든 신을이르는 말이다. 처음에는 편편한 나무로 된 바닥에 끈을 단 모양이었으나 점차 보통의 신과 같은 모양으로 발달했다. 나막신을 언제부터 신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많은유물과기록이남아있다. 흔히 비가 올 때 신던 신발로만 알고 있으나 마른날에도 종종 신었다고 하며, 신분이나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사용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극’이라 했고, 한국에서는 ‘목혜(木鞋)’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부터 ‘나막신’이라 했는데 최남선(崔南善)은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라 했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개 오동나무, 소나무, 오리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는데, 남자용은좀더투박했으며, 여자용은측면에 여러가지무늬를 그리거나코를 맵시있게 팠다. 굽 끝에는중국의 극처럼
2009년 10월1일 233호 김 익주박사•문화재청국립해양유물 전시관(1986~2004)•現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이사•경담문화재보존연구소소장
호로고루 (瓠蘆古壘) 성터경기도 연천의 임진강 북쪽기슭에 삼각형의 삼국시대 성터가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등에는 삼국통일을 전후해 이 지역에서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임진강이 이곳에서 하류 쪽으로 가면서 강폭이 넓어지고, 수심이 깊어지는 데다 현무암대지를 따라 10 m를 넘는 단애가 형성되어 있어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성벽의 전체둘레는 약 400m이고, 동벽 정상부와 서쪽 끝부분에 장대(將臺)가 설치되어 있다. 호로고루에서는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를 비롯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기와류이며, 고구려 문화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
高峯文集목판우리사회는어느새책을읽지않는사회가되어있다. 온통입시에내몰린학생들에게, 꿈꾸는 대신 살아남기를 주문하는, 그리고 살아남기를 택하는 우리사회인 것이다. 책 권하지 않는 사회, 아니 책 권하지못하는 사회가 됐다. 각종 참고서와 학습지를풀어야 하고, ‘고전 요약본’을 읽고, 표준 또는 모범답 안의작성을 훈련한다. 성장해서는 실용지식의원천을흡수하기 위해 영어공부가 최우선이고, 겨우 성공담이나 성공하는 사람들의습관이나비기를 담아놓은책을 읽는다. 또 우리는 기록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 습관은개인이나 가정이나기업이나 행정관청모두에 만연해있다. 중요한 인물도 일기를 남기는 일이 드물며,웬만한 회의나 간담회에서의 기록도 부실하기짝이없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우리의 오랜 습관인가? 그
청동기시대 논농사 유적 2 0 0 6년 경상북도안동의저전리에서국내에서처음으로청동기시대의저수관련유구 가발견되었다. 이로서청동기시대전기의사람들도저수지를만들고그물을관개하여농 사를지었다는사실을알게되었다. 유적조사의초기단계에는저수지가아닐가능성이제 기되기도 하였으나, 조사가 확장되면서 출수구(出水口)와 입수구(入水口), 관개수로 등이 뚜렷하게확인되어청동기시대의저수지임이분명해졌다.저수지 바닥에서는 다량의 무문토기(孔列土器, 丹塗磨硏土器등)와 함께 석검편, 석촉 편, 미완성 석기, 석기박편 등이 출토되었다. 출수구(出水口) 쪽에서는 보(洑)시설의 잔재 가출토되었다. 저수지가폐기된후가장자리를따라가면서시설된것으로보이는관개용 수로도 발굴되었다. 수로상에서는 또한말목류를포함한용도미상의 목기와 목재류가 출 토되었다. 수
탄화목재 고고학적인 조사과정에서 발견되는 유물에는 탄 화목, 탄화미, 탄화곡물 등의 이름이 흔하다‘. 탄화’ 라는 접두사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유기물을 적 당한 조건하에서 가열하면 열분해하여 비결정성탄 소를 생성하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목재를 포함 한 대부분의 유기물은 3 0 0∼4 0 0℃에서 탄화를 일 으킨다. 유기물의 탄화는 곧 黑化를 연상시키며 따 라서 외관상 검은색을 보이는 것에는 모두‘흑화’ 라는 접두사로 표현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목재를 포함한 유기물은 불에 노출되지 않 았더라도 흑색을 보일 수 있다는 데에서 유물해석 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목재의 경우에는 불 에 탄것인지의 여부가 유물이나 유구의 해석에서 관점을 크게 바꿀 수 있다. 또한 탄화여부 뿐만 아니
천년의 잠을 깨워라 제주 덕판배 제주사람들은 사면의 열린 바다를 기회와 자유, 그리고 도전의 상징 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조선중기에는 대선단을 이루어 한반도로 진출 해 해양활동을 하였다. 제주민들은 지극히 진취적이며 개척자적인 모험가들이었다.‘ 노도의 바다’로 알 려진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의 소위‘제 위 바당’에 적응한‘제주배(덕판배)’는 조선배보다 날쌔고 일본배보다는 견고해서 수전 시 공방에 유리한 나무로 된 갑판선 이었다. 제주도 해역의 배는 덕판배와‘티우’라고 하는 뗏목 배로 나눌 수 있는데, 덕판배 는 어선이었음과 동시에 연륙선이기도 하였다.덕판배는 제주섬의 암석해안을 의식해서 만든 배의 맨 앞부분 상부에 두툼한 나무판인‘덕판’과 그 밑에 가로로 댄 통나무 보호대가 충돌 시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