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의 8.15 해방, 그러나정태성 사장이 47세 되던 해에 8.15 해방이 되었다.8.15 해방은 온 겨레의 가슴속에 독립된 내 나라를 건설하자는 뜨거운 의욕을 불러일으킨 감격적인 선물이었다. 그러나 해방된지 열흘이 못되서 8.15 해방이 평탄한 앞날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38선을 분계선으로 해서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진주할 것이라는 라디오 뉴스와 함께 사회는 완전히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공공질서와 경제질서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쌀값이나 생필품가격은 부르는게 값이고, 부르는대로 주어도 살수가 없었다. 치안대가 해산되고 미군정이 실시되었지만 군정세력은 농촌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이때부터 정당 사회단체들끼리 충돌이 시작되었다. 우익과 좌익의 싸움이었다. 조그만 시골 봉화읍까
20세에 동갑내기 규수와 결혼정태성 회장이 결혼한 것은 3.1운동 한 해 전인 1918년 봄.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1907년에 조혼 금지령이 내려지긴 했으나 아직도 14~15세에 결혼하는 풍습이 남아있던 당시로서는 20살에 결혼한다는 것은 좀 늦은 편이었다. 처가는 안동군 녹전면 갈산리 임홍근씨의 차녀 ‘임봉은’이라는 동갑내기 규수였다. 그는 안동으로 말을 타고 장가를 갔다. 잔치는 처가에서 교회식으로 치렀다. 처가에서 며칠 지내고 영주로 신행을 왔다. 그리하여 부모님과 한집에서 살림을 차렸다.결혼생활은 그럭저럭 행복했고, 정미소도 번창해갔다. 그는 맏아들로서 아버님의 사업을 돕는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갔다. 결혼한 지 1년 반 만에 장녀를 낳았고(1920) 그로부터 2년 후에 다시 차녀를 낳았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읍에는 몽고군의 침략에 최후까지 항쟁하던 삼별초(三別抄)1)의 유적지로서 ‘항몽 유적지’가 있다. 1231년부터 40여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몽고에 대항하던 삼별초가 1271년 진도에서 여·몽 연합군에 패전한 후 김통정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제주로 들어와 끝까지 항전한 유서 깊은 성터이다. 고려 원종11년(1270) 2월 고려 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고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맞서 고려 김방경과 몽고의 흔도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최후까지 항쟁하다 원종14년(1273)에 전원 순의한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이다. 15리에 걸쳐 토성으로 외성을 쌓고 다시 석성으로 내성을 쌓아 이중으로 성곽을 구축한 형태로 관아와 궁궐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결국 이곳에서
전라남도 순천시의 송광면(松光面) 조계산(曹溪山) 서쪽에는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 사찰로서 유서 깊은 절인 송광사(松廣寺)가 있다. 이 절은 신라 말기에 창건 되어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해 대찰로 중건했다.1842년(헌종 8)에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三尊佛)·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 이후 1920년대에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차례로 복원해 옛모습을 되찾았다.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중수해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
우리의 옛 민속에는 하늘과 땅의 신령(神靈)을 청해 배알(拜謁)하기 위해 향(香)을 피우거나 향을 묻는 풍습이 있었으며, 내세(來世)의 복을 축원하기 위해 강이나 바다에 향을 묻는 행사를 매향(埋香) 또는 침향(沈香)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에 사용된 향은 물에 넣으면 가라앉는 침수향(沈水香)이었다.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매향에 관한 기록물로서는 경남 사천에 있는 사천매향비(泗川埋香碑)는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세운 것으로 보물 614호로 지정돼 있다. 판독된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고려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때에 불교 승려들을 중심으로 4,100여 명이 계(契)를 조직해, 왕의 만수무강, 나라의 부강, 백성의 평안 등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에서 매향의식을 치렀다 한다. 전남 영암에는 영암엄
필자가 몸담고 있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는, 최근 군산 앞바다의 십이동파도 인근 해저에서(수심 약 18m) 11세기 말~12세기 초에 해당하는 다량의 고려자기를 실은채로 침몰한 선박을 발굴조사하였다. 아직 선박은 발굴되지 않았으나 바닥판과 좌우의 외벽을 연결하는 판의 일부가 남아있는 것을 조사 하였으며, 조사과정에서 도자기의 상하좌우에 소나무, 짚, 갈대 등으로 채워진 완충 재료를 확인하였다. 청자를 포개면서 상하좌우 완충재로 짚과 갈대를 이용하였고, 포개어진 청자 열 사이에는 소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완충 목재로 이용함으로써 운송중의 파손을 방지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세간의 관심을 끄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필자는 주변의 일반인 들이나 학자들을 불문하고, 많은 분들로부터 표제의 이러한 질문을 자주 접
우리나라의 식목일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신라는 문무왕 10년부터 8년간 당나라와 싸워서 문무왕 17년(서기 677년) 2월25일에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문무왕 17년 2월25일(양력 4월5일)을 기념해 나무를 심었던 것이 식목일의 처음 유래라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최치원이 경남 향양군수로 재직할 때 바람 피해와 재해 방지를 위해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우리나라 최초의 조림역사가 아닌가 한다.한편 고려시대에는 풍수사상의 영향 아래 수도가 있는 개성 송악산의 땅기운을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주로 바람의 피해를 예방하거나 땅기운이 약한 곳에 나무를 심어 보호해주려는 비보(裨補)조림을 통해 숲을 만들었
경북궁 복원사업(복원기간 1991~2009)은 18년간 정부예산 1,700여억원의 막대한 공사비가 투입되는 이 시대에 가장 큰 목조공사이다.경북궁은 조선왕궁의 정치이념에 따라 문화와 기술의 총력을 발휘해 이룩한 영조물이며, 고도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민족적 기상과 문화적 정수를 담고 있다.일제에 의해 파괴, 변형된 것을 보존하고 우리 문화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인식하는 역사교육의 장을 조성하는데 의의를 두고 경북궁을 복원한다고 한다.경복궁은 전각들 가운데 정사를 보던 곳으로 신하 등 외부인이 드나드는 외부 전각을 정전(正殿)이라 할 수 있는데 근정전, 경회루, 사정전, 수정전 등이 이에 해당하고 전각 중 궁실로 쓰이던 내부 전각은 외부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 등이
우리의 옛 목조건축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이 있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삼국유사 제3권 ‘황룡사 9층탑’ 편을 보면 백제의 목수 아비지가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와서 225척(당시 쓰인 고려척(尺)으로 환산하면 약 80m, 20층 빌딩높이)이나 되는 거대한 목탑을 세워 서라벌 장안 어디에서나 이 탑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만 겨우 찾을 수 있다고 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추정돼왔던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18호)은 일제시대에 사찰수리 중 발견된 묵서에 1376년 창건한 것으로 적혀 있어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이 이보다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얼른 보면 단정하고 깨끗할 뿐 특별한 화려함이나 기교를 발견하기가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은 우리 선조들의 목재 건조기술이 세계 최고임을 보여주고 있으나 아직도 그 신비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8만1천여장의 대장경판이 8백년이 지나도록 변형되지 않는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팔만대장경에 대한 문헌 기록은 , , 이규보의 , 등이 전부인데, 그 표현이 애매해 ‘대장경 판재’와 ‘제작 과정 판각지’등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어 그 비밀을 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현재 몇몇 사람들에 의해 하나씩 풀리고 있는 팔만대장경의 비밀은 정부차원에서 예산이 지원되면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현재까지 알려진 경판의 판재는 최근까지도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지만, 경판 2백여장을 표본추출하고 전자현미경으로 판재의 세포조직을 분석한 결과 모두 7수종으로 산벚나무가 1
목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건축재료이다.인류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목재를 사용해왔으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가장 친밀한 재료가 바로 목재이다.원시시대의 사냥도구인 돌도끼의 자루의 재료가 목재이며 움막집의 골격을 나무로 사용했으며 나무를 이용하여 불을 만드는 등 인류의 처음 생활과 구분지어 생각할 수 없는 목재의 역할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아직도 산에 가면 1950∼1970년대에 화전민이 살았던 집터가 쉽게 발견되는데 집터의 흔적을 살펴보면 돌무더기만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바로 화전민들의 집은 대부분 나무를 사용해 짓고 문은 한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모두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없는 것이다.어쩌면 약점이기도 한 목재가 썩는 문제는 당
“아름다운 여성을 아름다운 꽃으로 때리면 누가 더 아플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식물은 감각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식물이 사람보다 훨씬 민감하다.사람에게 가장 민감한 혀끝과 식물의 나뭇잎에 각각 전원을 접촉시켜 전류를 통하게 했을 때 나뭇잎은 1.5마이크로 암페어일 때 반응이 일어났지만 사람은 이보다 3배의 전류를 흘려보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또한 사람이 꽃으로 맞으면 약간 아픈 것으로 끝나지만 꽃은 빨리 시들거나 꺾어져 못쓰게 된다.나무는 자연소재로서 우리 사람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재료이다.나무 무늬는 사람이 눈으로 보았을 때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마음의 안정을 느끼고 호감이 가는 무늬이다. 나무 무늬
4대 문명의 발상지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4000년 무렵부터 점토를 평평한 곳에 발라서 건조되기 전에 날카로운 도구로 그림이나 글자를 표시하는 점토판을 기록재료로 이용했다. 이집트에서는 B.C. 3100년 무렵 파피루스라는 식물이 기록재료로 사용되었는데, 현재 종이(Paper)의 어원도 바로 Papyrus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또한 B.C. 3천년 경 인더스강 유역에 형성된 인도문명 지역에서는 주로 자작나무껍질과 구리판, 천, 짐승가죽 등을 기록재료로 이용하였다. 그 후 불교가 형성되면서 불교경전을 주로 기록하기 위해 등장한 기록재료가 패다라(Palmyra Palm)이다. 패다라에 범어나 팔리어로 기록된 불교경전을 패엽경(貝葉經)이라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종이가 출현하기 전까지, 대
우리 생활주변에서 사용하는 재료 중 가장 우수한 기능을 가진 재료는 목재이며 목재 중 가장 비싼 재료는 악기재료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특히 명품 바이올린 한 개의 가격은 고급아파트의 가격보다도 더 비싸 보험까지도 든다고 한다.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목재가 가지고 있는 음향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대체재료는 없다.악기재료는 대부분 특별한 수종만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오랜 경험과 연구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바이올린 표면은 가문비나무, 뒤판은 단풍나무를 사용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나무를 사용하여 제작하는데 특히 나무 결의 간격이 일정해야 명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이러한 사실은 목재의 음향적 특성이 청각에 의해 구별 될 수 있을 정도이며 목재의 음색은 방사음의 음향스펙트럼 분석에 의해 알 수 있고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양장리]한반도 서남부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務安郡은 동쪽으로는 영산강을 끼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있어 오래 전부터 삶의 터전이 되어왔던 곳이다. 동쪽은 영산강을 건너 나주시와 영암군, 남쪽은 목포시, 북쪽은 함평군과 접하고, 서쪽은 신안군의 섬들과 마주한다. 노령산맥의 한 지맥이 비옥한 나주평야를 지나 전라남도의 남서쪽 끝에 무안반도를 형성한, 낮은 산지와 구릉, 평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황토골이다.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서해안 고속도로 목포-무안 구간이 1993년 말에 착공됨에 따라, 파괴가 불가피한 유적을 조사한 결과 농경활동과 관련한 저습지와 함께 丸壕를 두른 대규모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연차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기원 후 4~5세기 대를
수상 운송수단의 발달은 매우 오래 전부터 인류의 발달과 함께 해 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면 B.C. 40,000년 경에 이미 동남아시아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까지 80~100km의 긴 항해를 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도 일찌기 바다나 강을 이동의 수단이나 생활의 터전으로 활용하였던 사실들을, 경남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청동기 시대 이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다, 강, 호수 등지에 가라앉아 있는 고대유적이나 유물 등을 발굴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복원하려는 고고학의 한 분야를 水中考古學(Underwater archaeology)이라 한다. 이 수중고고학에 속하는 한 분야로서 고대의 선박과 浮體를 연구하는 선박고고학이 있다. 배의 발달은 통나무를 물에 띄운 浮木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삶의 흔적 또는 문화활동의 소산으로서 남겨진 것(유물)은 고고학 · 역사학 · 민속 · 생활양식 등에서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문화재의 이름을 갖게 된다. 대를 이어 전승된 유물이나 건조물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땅속이나 물밑에서 그 모습을 감추고 살아왔던 유물들은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의 손길을 받으면서 햇볕을 보게 되는 것이다.과거를 다루되, 역사학과는 달리 문자기록이 아닌 물적 증거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考古學은 遺物 , 遺跡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과거의 인류가 남겨놓은 有形物(물질자료)을 통해 선조들이 걸어온 과거사와 그 文化像을 추적하는 학문인 것이다. 현대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 인접분야의 도움이 상호 요구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고학에 필요 한 보조학문
정태성 회장은 온 가족이 기독교 신자가 되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그러는 동안 아버님 가슴속에 신앙의 불씨가 지펴진 것을 온 가족들이 짐작하게 되었다. 이윽고 아버님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가족들 모두 예수를 믿었다. 아버님은 집안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삼신단을 없애버리고 사랑방을 예배를 보는 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오랫동안 미신을 숭배하던 가정에서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서당에 다니던 내 친구들 10여명도 모여들었고,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참여하였다. 아버님은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긴 장대에 달아 마당가에 세우셨다. 이 깃발로 정식 교회는 아니지만, 예배당이란 표시가 되었고, 우리집 분위기가 완연히 달라졌다.」신문물과의 만남정태성 회장이 9살이던 1907년은 고종황제가 관리들에게 틀
정태성 회장은 1899년 12월27일 생이다.20세기를 닷새 앞두고 경상북도 영주군 아산면 조와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동학란이 일어난 지 5년 후가 되는 해였었다.1894년 2월. 전라도 고부군의 농민들이 조병갑 군수의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전봉준이 조직한 동학군이 가세한 것이 동학란이다. 동학군은 전봉준의 지휘 하에 관군과 싸웠으며 각처의 관청을 거의 다 점령하여, 관청이 보유한 무기를 뺏고 억울하게 갇힌 죄수들을 모두 석방시켰다.동학군의 기세는 막강해서 전라도는 물론 충청도 대부분과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평안도까지 파급되었다.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한 관군 일천 명이 군산에 상륙했으나 되레 크게 패했고, 동학군은 5월 31일 전주까지 함락했다. 동학군의 세력이
1948년 9월. 그의 나이 49세 때 대구 침산동의 부지 7천평에 성창기업이라는 합판공장을 세운 것이 오늘날 부산 성창기업의 모체이다. 그로부터 반세기나 되는 긴 세월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성창임원(盛昌林園), 성창학원, 성창병원 등을 설립한 장본인이 고 정태성 회장이다. 그분은 가고 없지만, 그분의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행히도 다른 두 분(강석진 회장, 전택보 회장)과는 달리 돌아가시기 직전 자서전을 집필하시어 그의 삶과 생각을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여기에 그분이 자서전에서 본인의 일생을 소회한 글을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살아계셨을 때의 육성을 그대로 듣는 듯하다.내 소년시절의 꿈은 육림사업 새해가 되면 미수(米壽)의 나이를 맞이하게 된다.칠십은 고래희(古來稀)라고